노래 ‘아침이슬’의 원작자이자 대학로의 상징이었던 소극장 ‘학전’을 설립해 33년간 운영했던 가수 김민기 씨가 21일 오후 8시 20분 별세했다. 향년 73세.
22일 유가족에 따르면 위암 4기로 투병 중이던 고인은 최근 폐렴까지 겹쳐 20일 응급실에 입원했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떴다.
고인의 노래는 암울한 군부 시절 저항의 상징이었다. ‘아침이슬’(1970년)을 비롯해 발표한 노래들은 민중가요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판매금지 처분을 받기도 했다. 고인은 1991년 소극장 ‘학전’을 열어 고 김광석 등의 무대로 인디밴드 공연 문화를 이끌었다. 1994년 초연한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관객 73만 명을 불러모으며 국내 창작 뮤지컬 바람을 일으켰다. 배우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김윤석 조승우(학전의 ‘독수리 5인방’) 등이 이곳 출신이다.
하지만 고인은 앞에 나서는 것보다 뒤에서 돕는 ‘뒷것’에 머물렀다. 고인은 마지막 가는 길에도 “나를 가지고 뭘 안 해도 된다”고 했다. 죽고 나서도 ‘뒷것’으로 남겨 달라는 얘기다.
‘아침이슬’로 청춘 울리고, ‘학전’으로 공연계 큰 발자취 남기고… “난 할 만큼 다 했다” 하늘무대로
[김민기 별세] 군사정권 시절 ‘상록수’ 등 발표… 저항운동 상징 되며 체포-취조 고난 ‘학전’ 열어 창작 뮤지컬 토대 닦아… 숱한 스타 배우 키우며 ‘뒷것’ 자처 “어린이가 미래”라며 어린이극 제작… ‘학전’ 간판 내린지 나흘만에 숨져
가수 김민기가 운영하다 경영난으로 폐관한 소극장 ‘학전’이 정부가 운영하는 ‘아르코꿈밭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 문을 열었던 17일. 그날은 김민기가 대학로에 있는 서울대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당초 개관 행사에 “불참한다”고 알려졌던 김민기도 사실 현장을 찾았다고 한다. 다만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지나면서 ‘쓱’ 봤다고. 33년간 학전을 운영했던 그에겐 ‘달라진 학전’에 만감이 교차했을 터. 학전의 간판이 내려간 지 나흘 만에 김민기는 세상을 떴다.
그는 정부(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새 극장의 운영에 대해 별다른 희망사항을 밝히지 않아 왔다. 하지만 22일 유족에 따르면 고인은 생전 혼잣말처럼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청소년과 신진 뮤지션이 ‘놀 수 있는 장’으로 마련해 주셨으면 좋겠다.” 생전 어린이·청소년극의 중요성을 깨닫고 사비를 털어가면서도 제작을 계속해 왔던 뜻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힌 것이다.
● 군부 시절, 시 같은 가사로 청춘들 마음 울려
고인은 1969년 서울대 미대 회화과에 입학한 뒤 동문 김영세와 함께 2인조 밴드 ‘도비두’를 결성하며 가요계에 들어왔다. 특히 삶을 성찰한 한 편의 시 같은 아름다운 가사는 새로운 문화에 목말라 있던 청춘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아침이슬’ ‘상록수’ ‘작은 연못’ ‘백구’ ‘봉우리’ 등이 탄생했다. 가수 한영애는 “중학교 때부터 김민기의 노랫말을 들으며 자랐다. 광장에서, 대학가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김민기 노래가 늘 울려 퍼져 제게 큰 영향을 줬다”고 했다.
하지만 노래가 저항운동의 상징이 될수록 삶은 고단해졌다. 아침이슬, 상록수가 금지곡으로 지정되고 1971년 낸 솔로 1집 ‘김민기’도 판매 금지됐다. 전역 후 공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비밀리에 음악 활동을 계속했지만 군사정권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숱하게 체포되고 취조를 받았다. 고인은 한동안 지방에서 농사를 지으며 음악과 거리를 두기도 했다.
그를 다시 세상으로 불러낸 건 학전이었다. 학전을 차리기 위해 목돈이 필요해진 그는 그간 썼던 노래를 모아 총 4장의 ‘김민기 전집’(1993년)을 발표했다. 1971년 낸 첫 음반이 판매 금지 조치된 후 처음으로 정식 발표한 음반이었다.
● 스타 키우면서도 본인은 ‘뒷것’ 자처
1991년 대학로 ‘학전’의 문을 연 그는 공연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지하철 1호선’ ‘모스키토’ 등을 만들어 국내 창작 뮤지컬의 토대를 닦은 것. ‘의형제’는 1998년 제35회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지하철 1호선’으로 독일 문화훈장인 ‘괴테 메달’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서항석, 윤이상, 백남준에 이어 네 번째였다.
학전은 배우들의 ‘사관학교’로 유명했다. 스타들을 키우면서도 그는 언제나 별 뒤에 서 있는 ‘뒷것’에 머물렀다. 배우 장현성은 “졸업 후 용돈을 벌어야 해서 학전 입단 오디션을 본 게 배우 인생의 시작이었다. 학전에서 작품들을 공부하며 내적으로도 많은 성장을 이뤘다”고 했다. 고인은 수익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표준계약서도 작성했다. 배우 오지혜는 “힘없는 연극배우가 일반 극단에서 계약서 쓰고 공연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시절”이라고 했다.
창작 뮤지컬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돌연 어린이극으로 핸들을 꺾었다. 국내 공연계에서 어린이극은 소위 ‘돈 안 되는’ 장르로 꼽히지만 “어린이들이 미래이고, 이들이 좋은 공연을 보고 자라야 한국의 미래 문화가 밝다”는 게 소신이었다.
최근 수개월은 고인에게 ‘아픈’ 시간이었다. 자식처럼 생각했던 학전이 올 3월 15일 문을 닫은 것. 오랜 경영난에 김민기의 건강까지 나빠지며 폐관을 결정했다. 학전의 폐관 전후로 높아진 대중의 관심에도 고인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건강이 악화되자 주변에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끝내는 게 맞다. 고맙다. 나는 할 만큼 다 했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이미영 씨와 2남이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발인은 24일 오전 8시. 02-207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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