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죽을 수 있는 사회로
〈하〉 ‘맞춤 돌봄’ 갈길 먼 한국
병원 대신 자택 머물며 건강 관리… 건보-요양-지자체 서비스 통합 필수
방문 혈당체크-운동 지도 시범사업… 최대 3회, 3개월만 제공 ‘한계’
“이분들이 없었다면 혼자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렸을 겁니다.”
지난달 11일 경기 부천시 자택에서 만난 김영덕 씨(69)는 격주로 그를 찾아오는 부천시보건소 ‘통합건강관리팀’ 소속 간호사와 영양사, 운동관리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김 씨는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고혈압, 당뇨 등 만성질환까지 있는 ‘고위험군’이다. 통합건강관리팀은 방문할 때마다 간호사를 통해 혈당과 혈압을 확인하고, 영양사가 냉장고와 식단을 점검하며, 운동관리사가 적절한 운동을 지도하는 맞춤형 건강관리 서비스를 제공한다.
● ‘집에서 죽을 수 있는 사회’ 시범사업
김 씨가 통합건강관리팀을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해 말 통합돌봄을 시작하면서 김 씨의 혈당 수치가 578mg/dL이라는 걸 확인한 간호사는 당뇨 약 누락이 원인이라는 걸 파악하고 그를 긴급 입원시켰다. 김 씨는 “혼자 살며 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100m를 못 걸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됐다”며 “퇴원 후 관리를 받으며 식습관을 고치고 운동도 하게 됐다. 적절하게 약도 복용하다 보니 이제 혈당이 160mg/dL로 내려갔고 산책도 가능해졌다”면서 웃었다.
홀몸인 김 씨가 병원 대신 자택에 머물며 다양한 통합관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부천시가 2021년부터 시행 중인 보건복지부의 ‘통합돌봄 시범사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 시범사업을 통해 노인들이 익숙한 집에서 자연스럽게 늙어가고 임종을 맞을 수 있는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있다. 다만 시범사업이다 보니 통합관리 서비스는 3개월만 제공되고 최대 3회까지만 연장이 가능하다는 한계는 있다. 김 씨 역시 조만간 다시 스스로 건강을 관리해야 한다.
● 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지자체 서비스 ‘제각각’
김 씨에게 제공되는 ‘맞춤형 통합돌봄’을 위해선 국민건강보험, 노인장기요양보험, 지방자치단체에서 현재 제각각 운영 중인 의료-간호-요양 서비스 통합이 필수적이다.
지금은 요양병원의 경우 건강보험 수가(건강보험으로 지급되는 진료비)로 운영되고, 요양원과 요양보호사는 장기요양보험 급여로 운영되며, 지자체에선 이와 별도로 복지 담당 공무원을 통해 사회복지관이나 자원봉사자 방문돌봄 서비스를 지원한다.
서로 기준이 다르다 보니 맞춤형 지원이 어렵고, 조금만 도와주면 익숙한 집에서 지낼 수 있는 노인도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 입원하는 경우가 많다. 요양보호사로부터 목욕 지원을 받는데 사회복지관이 다시 목욕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중복 수혜 문제도 생긴다.
정부는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돌봄평가기관(CIZ)’을 모델로 통합 판정 체계를 개발해 부천시 등에서 시범사업을 하고 있다. CIZ에서 노인 개인마다 맞춤형 케어 플랜을 짜 주는 것처럼 요양병원, 요양원, 요양보호사, 돌봄서비스 등을 유기적으로 연계해 노인들이 가급적 집에서 필요한 서비스를 받으며 지낼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다.
국회에서도 올 2월 ‘지역 돌봄 통합지원법’이 통과돼 2026년 3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이 법이 시행되면 각 기관 간 정보 공유가 확대돼 각 지자체에서 국민건강보험공단 의료기록, 장기요양보험 등급판정 기록 등을 활용해 김 씨 같은 통합돌봄 대상을 발굴할 수 있게 된다.
병원에서 사망하는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낮은 네덜란드의 경우 방문 간호사가 창구가 돼 임종 직전까지 노인들이 자택에서 지낼 수 있도록 통합 관리를 해준다. 한국의 경우 복지부 산하 한국보건복지인재원에서 법 시행을 앞두고 통합 관리를 맡을 지자체 담당자를 교육 중이다. 이들이 노인들의 건강 상태를 관리하며 필요한 지원과 연계해 주는 코디네이터 역할을 잘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다. 복지부 관계자는 “현재 어떤 서비스가 지원되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통합지원정보 시스템도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통합돌봄 체계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원 확대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네덜란드의 경우 장기요양보험료율이 9.65%로 한국(0.92%)의 10배 이상이다.
● 39곳 뿐인 가정형 호스피스 전문기관 늘려야
집에서 죽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가정형 호스피스 서비스 활성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호스피스는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가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받는 대신 존엄한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의료 서비스다. 한국에선 2003년 암관리법을 통해 ‘완화의료’라는 이름으로 호스피스가 법제화됐으나 20년 넘게 지났음에도 가정에서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사례는 극히 일부와 불과하다.
국립호스피스센터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학술지에 올 1월 발표한 ‘한국 호스피스 이용 추세 및 현황(2018~2022)’에 따르면 한국 호스피스 이용률은 2018년 22.9%, 2019년 24.3%, 2020년 23.0%, 2021년 23.2%, 2022년 24.2%로 수년 동안 크게 늘지 않는 모습이다.
또 호스피스 이용 환자 대부분은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호스피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호스피스센터가 발간한 ‘2023년 국가 호스피스·완화의료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신규 호스피스 이용 환자 2만2394명 중 1만3041명(58.2%)이 호스피스 전문 병동에서 입원형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았다. 호스피스 병동이 아닌 일반병동에서 호스피스를 이용한 환자는 환자는 3854명(17.2%)였다. 반면 가정에서 가정형 호스피스를 받은 환자는 676명(3.0%)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생의 마지막인 임종을 집에서 맞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가정형 호스피스가 현재보다 대폭 확대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현재 입원형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요양병원을 포함해 전국 103곳에 달한다. 반면 가정형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39곳에 불과하다. 보건복지부는 ‘집에서 죽을(Dying in Place)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2028년까지 가정형 호스피스 전문기관을 80곳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김진형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는 “한국에선 도입 초기 대학병원에 입원한 암 환자 중심으로 호스피스가 설계돼 병원 중심의 호스피스 서비스가 발달했다”며 “말기 환자들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가족들과 마지막을 보내기를 원한다는 점을 고려해 입원 중심의 호스피스는 최소화하고 가정형 호스피스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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