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 기준 모호’ 제기능 못하는 볼라드
韓 ‘속도 낮은 차 충격 견뎌야’ 규정… 어린이보호구역 설치 규정도 없어
美, 차량 충돌상황 고려해 규격 강화… 6.8t 차-시속 80㎞ 돌진에도 견뎌
“최소 제한속도 견딜수 있게 설치를”
5일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한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승용차가 인도로 돌진해 행인 1명을 숨지게 한 사고와 관련해 차량의 인도 돌진을 막는 ‘자동차 진입억제용 말뚝’(볼라드)의 설계 기준이 모호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6일 경찰과 현장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종합하면 5일 오전 10시 40분경 50대 후반의 남성이 운전하는 회색 승용차는 이촌동의 한 스쿨존 삼거리 앞에서 정지했다. 이후 차량은 갑자기 속도를 높여 10여 m 앞 인도 경계에 설치된 볼라드를 향해 돌진했다. 가속 구간이 짧아 속도가 높지 않았지만 차량은 철제 볼라드를 부수고 인도로 진입해 행인 2명을 치었다.
● 저속 승용차도 막지 못한 볼라드
현행 보행안전법은 볼라드 설치 규격에 대해 ‘속도가 낮은 자동차 충격에 견딜 수 있는 구조로 해야 한다’고 규정할 뿐 구체적인 설계 기준을 제시하지 않는다. 교통 분야에서 통상적으로 시속 40km 이하일 때 ‘속도가 낮다’고 본다. 취재팀이 전문가와 함께 CCTV에 담긴 모습, 해당 승용차 성능 등을 종합해 산출한 당시 차량의 속도는 시속 30∼40km로 예측된다. 만약 볼라드의 강도가 더 높았다면 인명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강도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다 보니, 서울 곳곳에 설치된 볼라드는 주차 차량을 막는 용도로 활용된다. 서울시 관계자는 “통상 주차하려는 차량이 인도에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게 (볼라드) 설치 목적”이라며 “충돌 상황은 가정하지 않으며, 도로의 설계 속도와도 관련이 없다”고 밝혔다.
보행자가 차로로 이탈하는 것을 막는 ‘보행자용 가드레일’과 마찬가지로 차량 충돌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하는 목적으로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인도 통행 중 사상은 매년 2500명, 하루 7명꼴로 발생하고 있다. 경찰청 교통사고 통계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인도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상자 수만 1만2256명에 달한다. 사망자는 총 128명으로 집계됐다. 올해도 지난달 1일 서울 시청역 인근 역주행 사고로 사상자 16명이 발생했다. 이후 보름 새 서울역 인근에서 경차가 인도 위 행인 2명을 덮쳤고, 대구 동구에서도 승용차가 인도로 돌진해 행인 1명을 다치게 했다.
한국과 달리 미국은 차량 충돌 상황을 가정해 강화된 규격의 볼라드를 사용하고 있다. 미국 네바다주는 2017년 차량 돌진 테러를 방지하기 위해 500만 달러(약 69억 원)를 들여 6.8t 무게의 차량이 시속 80km로 돌진해도 견딜 수 있는 700여 개의 볼라드를 설치했다. 인도 내 교통사고가 연이어 발생하자, 서울시와 각 자치구는 지난달부터 관할 내 가드레일과 볼라드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서는 등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 볼라드 없는 스쿨존
특히 이번 이촌동 사고처럼 평소 아이들의 왕래가 잦은 곳일수록 관련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해 1월 스쿨존으로 지정된 도로에는 반드시 보도를 설치하고, 가드레일을 우선적으로 설치하도록 명시한 도로교통법 개정안 일명 ‘동원이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하지만 볼라드 설치와 관련된 조항은 담기지 않았다.
취재팀이 이날 오후 서울 은평구, 서대문구, 마포구의 초등학교와 유치원 인근 횡단보도 24곳을 확인한 결과 15곳에 볼라드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은평구 증산동의 폭 10m짜리 횡단보도에는 볼라드가 없어 하교하는 아이들을 태우러 온 학원차량이 인도를 밟고 지나가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횡단보도 앞 인도는 경계석 높이가 낮고 아이가 많이 몰려 인도 돌진 사고에 취약하지만 이런 안전시설 없이 방치된 것이다. 조준한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스쿨존 등 보행자 보호가 우선시되는 지역에 설치되는 볼라드는 최소한 해당 도로의 제한속도를 견딜 수 있는 내구성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오늘(7일) 이촌동 사고 당시 차량의 정확한 속도 등을 확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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