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많은 분이 강제징용과 수탈로 인한 궁핍 등의 이유로 고향 땅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광복 후 어렵사리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아픈 몸으로 어렵게 살아가기도 합니다. 내 나라가 없을 때, 보호받지 못했던 분들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동아일보와 대한적십자사는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시는 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재한 원폭 피해자, 강제징용 사할린 동포, 고려인과 3회차에 걸쳐 ‘동행’하며 상처를 딛고 함께 살아간다는 의미를 되짚어 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국으로 가는 길이 꼭 트일 거거든. 그땐 많은 생각 말고, 내가 죽고 없어도 너는 꼭 한국으로 가라.”
사할린 동포 김영길 씨(80) 가슴 속엔 40여 년 전 죽은 아버지의 유언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습니다. 사할린 출생인 그가 70년간 일군 사할린에서의 삶을 놔두고 2013년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경남 합천군 출신 아버지는 생전 늘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탄광에서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할 때면, 눈시울 붉어진 채 반주 한잔 걸치며 아리랑을 부르던 아버지….
1916년생인 김 씨의 아버지는 20대 중반에 사할린에 강제로 끌려왔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군인들에게 연행됐다고 합니다.
1945년 8월,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다는 소식에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반색합니다. 하지만 패전국 일본은 한국인 귀환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었고 사할린 재건 노동력이 필요했던 소련은 그의 귀환길을 가로막았습니다. 미군정도 우리 동포 귀환에 적극적이진 않았고요.
소련 국적은 얻기 힘들었던데다, 북한 국적을 받을 경우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기에 김 씨의 아버지는 무국적 상태로 살아갔습니다. 국적이 없다 보니 러시아 안에서조차 자유롭게 이동하기 어려웠고, 한평생 사할린에 발이 묶인 삶을 살다 폐암으로 눈을 감았습니다.
“아버지가 폐암에 걸리신 게 탄광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결국 고향 땅 한번 못 밟아보시고 돌아가셨으니 통탄할 노릇이죠. 아버지의 영향인지, 뿌리를 찾으려는 본능인지…. 러시아 국적을 받은 뒤에도 ‘한국에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았어요. 한국은 내 아버지의 고향이 아니라 내 조국입니다.”
2. 짚어 보다 : 얼어붙은 땅으로 끌려간 한인
한국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지명. 사할린은 러시아 동부, 일본 동북쪽 오호츠크해에 있는 면적 7만8000㎢(남한 면적의 약 4분의 3)의 제법 큰 섬입니다. 이곳의 겨울은 6개월이나 될 정도로 긴 데다가 평균 기온이 영하 24도까지 내려갈 정도여서,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다소 척박한 환경입니다.
1800년대 말까지 사할린은 “석탄 위에 앉아서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을 만큼 인구도 적고 개발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죄수들의 유형지가 됐을 정도였죠. 그런데 이런 땅에 한인들이 어느 순간부터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강제징용. 1905년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사할린의 북위 50도 이남을 점유한 뒤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일본인들은 사할린 이주를 기피했고, 이에 일본이 강제 또는 반강제적으로 한인 유입에 나선 것입니다.
1939~1943년 사할린 강제징용 한인 노동자 (단위: 명)
연도
1939
1940
1941
1942
1943
광산노동자
2578
1311
800
3986
1835
건설노동자
533
1294
651
1960
976
총인원
3301
2605
1451
5954
2811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한인만 1만6000여 명에 달합니다. 일본은 모집 방식으로 한인들을 이주시키다 점차 관 알선 형태로, 나아가 전쟁 막바지인 1944년부터는 강제징용으로 한인들을 동원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이주 동기(부모 세대)
이주 동기
비율(%)
강제징용
31.1
모집
31.1
관 알선
4.7
가족 따라서
2.0
남편, 부모 찾아서
1.4
모름
29.7
강제 이주한 한인들은 탄광, 벌목장, 비행장, 도로 공사 현장 등에 배치됐습니다. 일본인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더 오랜 시간 고강도로 일을 했는데 임금은 턱없이 적었고 식량 배급은 부족했습니다.
한인들은 그 적은 임금마저도 온전히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한인 노동자들이 작업장에 들어갈 때부터 교통비와 식비, 숙박비를 빚으로 짊어지도록 했습니다. 랜턴이나 곡괭이 같은 장비부터 각종 보험 및 연금, 주민세까지 노동자의 부채로 책정했습니다.
임금을 받으면 도주할 것을 우려해 용돈 수준의 금액만 현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강제로 저금하게 하는 ‘우편 저금’도 시행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체불된 노동자들의 우편저금 액수는 1억8007만 엔.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조4506억 원 규모입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 할 혹독한 환경 속에서 노동착취까지 당하며 일을 해야 했던 사할린 동포들. 이들은 ‘언젠가 고향에 꼭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하루하루 버텼을 것입니다.
3. 방치되다 : 광복에도 돌아오지 못한 이유
1945년 8월 15일 한국의 광복 소식에, 사할린 한인들에게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치는 듯했습니다. 이듬해 12월 ‘소련 지구 인양에 관한 미·소 협정’이 체결되면서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이 순차적으로 귀환한 것입니다. 사할린 한인도 고국의 땅을 밟을 날이 머지않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들이 놓인 상황은 전범국인 일본의 국민보다도 못했습니다. 일본은 ‘한국이 독립한 만큼 한국인은 일본 국적이 아니므로 한인 귀환에 대한 의무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소련은 일본인의 송환으로 사할린 재건에 필요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한인의 귀환을 막았습니다. 미군정도 남한 경제에 부담이 될 것을 우려해 귀환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각 나라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길은 가로막힌 채 방치된 것이죠.
문제 해결의 물꼬가 터진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 무렵부터입니다. 한국이 소련을 비롯해 구 동구권 국가들과 본격적인 관계를 맺었고, 1989년 9월 소련 정부가 한국을 방문지로 한 출국을 허가하면서 사할린 동포 40명의 일시 모국 방문이 허용된 것입니다.
나아가 1990년에는 한국과 소련 간 첫 정상회담이 열리고 왕래가 더욱 자유로워지면서 영주귀국이 중요한 과제로 다뤄지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에는 한국 정부가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일본에 공식적으로 요구하고, 러시아 연방에는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해 협조를 구했고요. 그 결과 1992년 무연고 사할린 동포 77명이 처음으로 영주귀국 해 강원 춘천 사랑의집에 입소하게 됐습니다.
이듬해 11월부터는 3차에 걸친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 사할린 한인 문제 조기 해결 추진을 위한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그 결과 영주귀국자를 위한 주택과 요양시설 건립을 위해 한국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일본 정부가 건설비용과 정착지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영주귀국이 점차 확대됐습니다.
최근 15년간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자 입국 현황 (단위: 명)
연도
인원수
연도
인원수
2009
837
2017
9
2010
127
2018
3
2011
102
2019
9
2012
108
2020
0 (코로나19 영향)
2013
74
2021
334
2014
103
2022
0 (우크라이나 전쟁 영향)
2015
83
2023
344
2016
11
누적
5086
4. 또다시 그리워하다 : ‘이산가족’
사할린으로 끌려간 지 50여 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지만 사할린 동포들은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영주귀국을 할 수 있는 조건, ‘1945년 8월 15일 이전 사할린 이주 또는 사할린 출생자’(사할린 동포 1세) 때문이었습니다. 즉 사할린에서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은 이들 상당수가 영주귀국 시 사할린에 자식을 두고 올 수밖에 없는 ‘이산의 아픔’을 감내해야 했던 것입니다. 2008년 영주귀국 대상이 ‘동포 1세와 그 배우자, 장애인 자녀 1명’으로 확대됐지만 여전히 자녀와 떨어져 살아야 하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2020년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마련되면서 영주귀국 대상이 ‘사할린 동포(1세)의 배우자 및 직계비속 1인과 그 배우자’로 넓혀졌습니다. 하지만 이 조건 역시 여전히 아쉬움이 많습니다. 예컨대 같은 강제징용 피해자의 자녀라 하더라도 1944년생 형은 영주귀국을 할 수 있지만, 1946년생 동생은 사할린 한인 1세로 분류되지 않아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또 사할린 한인 1세가 이미 사망한 경우 그 가족은 영주귀국 대상에서 제외되는 상황입니다.
5. 되찾다 : 고국에서의 평범한 삶
무사히 영주귀국을 하더라도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의 경제적인 문제와 건강 문제는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정착 실태에 대한 조사는 2009년 이뤄진 연구가 유일무이합니다. 해당 연구에 따르면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 100명을 대상으로 현재 생활에서 불편한 점 세 가지를 꼽도록 한 결과 ‘경제적 어려움’(24.4%)이 두 번째로 높게 나타났습니다.
현재 생활에서 불편한 점 (단위: 건, %)
항목
응답 수(건)
비율(%)
사할린을 자주 방문하지 못한다
846
32.1
경제적으로 어렵다
642
24.4
외롭다
501
19.0
한국에서 사할린의 가족과 자주 연락할 수 없다
206
7.8
몸이 아픈데 의료혜택을 제대로 못 받는다
141
5.4
기타
301
11.3
한국 정부는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인의 정착을 위해 국민임대주택과 복지급여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고령이고, 자녀들과 떨어져 영주 귀국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가족의 보살핌이나 도움을 받을 수 없어 정착에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그나마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에서 고령 노인과 치매 및 뇌졸중 등 중증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데요. 사할린 동포가 고령화가 진행됨에 따라 요양과 돌봄의 지원도 점점 더 절실해집니다.
동아일보는 7월 24, 25일 사할린 동포가 거주하는 안산 고향마을과 인천사할린동포복지회관을 찾아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분들을 만났습니다. 이분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고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면서도, 가족들과 떨어져 사는 삶에 대한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박공길 씨(81) “2008년에 아내와 함께 영주 귀국했는데, 올해 아내가 죽었어요.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 내외는 영주귀국을 원하고 있어요. 내 욕심에는 아들 내외와 대학생 손자가 모두 한국에 와서 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영익 씨(95) “사할린 동포 2세인 제 여동생은 사할린 동포 1세였던 남편을 따라 영주 귀국했는데,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홀로 살고 있어요. 자식들이 사할린에 있는데도 사망한 1세의 자식은 영주귀국 대상에 포함되지 않다 보니 자식 도움도 못 받고 홀로 병원 생활을 하고 있어요.”
많은 이들이 한국에서 평범하게 누리는 삶,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인 사할린 동포들도 마땅히 누릴 수 있도록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동아일보와 대한적십자사는 광복절을 맞아 일제강점기 무렵 사할린에 강제징용된 피해자와 가족을 지원하는 기부 캠페인(아래 링크)을 펼칩니다. 모금액은 기부금품법에 의해 관리되며 사용 내역은 대한적십자사 기부금품 모집 및 지출 명세를 통해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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