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유감스러운 말씀을 전합니다. 당사는 일부 직원을 감원하기로 했습니다. 유감스럽게 귀하도 정리해고 대상에 포함됐습니다. 더 이상 직무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꽤 오랜 시간 재직하던 회사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받으면 어떨 것 같으신가요? 심지어 아무런 언질 없이요. 일단 당혹스러움, 배신감, 허무함과 같은 감정이 들 것 같고요. 그다음 누군가는 자기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설 것이고, 아니면 재충전의 시간을 갖거나, 당분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는 선택을 할 겁니다.
그런데 지난해 1월, 16년간 몸담았던 글로벌 기업 구글에서 디렉터(임원)까지 지내다 정리해고를 당한 정김경숙 씨(56·로이스 김)는 남들의 예상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걷습니다. 정리해고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마트 시급제 직원, 카페 바리스타, 택시 운전, 펫 시터 등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겁니다.
부지런하게 사는 게 관성이어서 ‘오늘은 500보 이하로 걷기’ 같은 특이한 목표를 정해야만 집에서 쉴 수 있다고 하는데요. 남들이 보기에는 관성을 깨고 있지만 정작 스스로는 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그는 〈브렉퍼스트 시즌2〉의 첫 인터뷰이로 제격이었습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미국 본사로
그가 미국으로 향한 건 2019년, 51살 때였습니다. 구글코리아의 커뮤니케이션팀 리드(총괄 임원)였던 그는 ‘구글 본사에 인터내셔널 미디어를 담당하는 사람을 두면 좋겠다’는 제안을 부사장에게 합니다. 미국 본사에 있는 커뮤니케이션팀과 각 국가에 있는 구글 지사의 커뮤니케이션팀이 유기적으로 일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본사는 정 씨의 아이디어에 착안해 인터내셔널 미디어 담당직을 신설했습니다. 정 씨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자리는 아니었지만, 지원자 중 한 명이었던 정 씨에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미국행이 이뤄진 겁니다.
“영어를 써야 하고, 게다가 말 잘하는 친구들이 모인 곳이 커뮤니케이션팀이거든요. 출국을 앞두고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거에요. 그래도 한 번 가보자, 가서 망하고 다시 돌아오더라도 일단 해보자고 생각하면서 본사로 갔어요.”
팀이라고는 했지만, 처음에는 1명뿐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니 나라별 시차 때문에 새벽부터 저녁까지 업무를 해야 했죠. 하나씩 일을 풀어가며 성취감은 커졌고, 팀 규모도 점차 성장했습니다.
16년간 믿은 도끼에 발등 찍히다
내로라하는 회사들까지 직원을 해고하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구글은 정리해고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풍파로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회사들이 구조조정을 할 때도, 구글은 안전한 곳인 줄 알았다고 합니다. 구글코리아부터 시작하면 16년간 구글에 몸담아왔기에 더 확신했습니다.
“회사 후배들이 불안하다고 말하면, 제가 괜찮을 거라며 안심시켜 줬거든요. 저조차도 심리적으로 정리해고에 대한 준비가 전혀 안 된 상태였던 것이죠.”
지난해 1월,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려고 스마트폰을 켰습니다. 그런데 접속이 되질 않았습니다. ‘오류가 났나’ 생각하며 개인 메일함을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당신 고용에 관한 공지’라는 제목의 이메일이 있었습니다. ‘생뚱맞은 제목이네’라는 생각을 하며 열어본 메일에는 ‘당신은 정리해고 대상’이라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스팸 메일, 장난 메일이라 생각해 사실 다 읽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좀 이따가 저를 미국으로 이끌어주셨던 부사장님이 전화를 하셔서 ‘괜찮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실감하게 됐어요.”
당시 구글은 전 직원의 6%에 해당하는 1만2000명 규모의 구조조정을 벌입니다. 알고 보니 정 씨와 정 씨의 팀도 그 대상에 포함이 됐고요.
슬픔에는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가 있다고 하죠. 처음에는 구글이 대량 메일을 발송하면서 실수한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내일 ‘어제 보낸 건 실수였어. 너는 거기에 해당이 안 돼’라고 말하는 이메일이 다시 오진 않을까 내심 기대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런 메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화가 나더라고요. 난 열심히 일했고, 계속 인사 고과도 좋았고, 팀도 커졌고 인정도 받았는데. Why me?(왜 나야?) 하면서요. 제가 구글을 매우 좋아했거든요. 사람들도 저에게 ‘뼛속까지 구글러’라고 얘기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분노의 감정은 곧 현실에 대한 타협과 수용으로 이어졌습니다. 생각해 보니 25년 이상 직장 생활을 하면서 병가 한 번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좀 쉬어갈 때도 됐지’라며 생각을 전환했습니다. 그리고 갭 이어(gap year)를 갖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정리해고 통지를 받은 지 이틀 뒤, 일요일 밤. 그는 평소 해보고 싶었지만 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금요일에 정리해고 통지를 받았고 이틀이 지나 일요일 밤이 됐는데, 월요일이 오는 게 너무 두려운 거예요. 매일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내일부터는 날 찾는 사람이 없고, 그 많던 미팅도 없으니 ‘내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두렵더라고요.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이 뭘까 고민하다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각종 취미생활, 가고 싶은 여행지 등을 적는 게 일반적일 텐데 그가 적은 내용은 휴식이 아닌 ‘일(노동)’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몸 쓰는 일이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이라면 제품과 서비스의 한가운데서 고객을 직접 마주하는 일이었다는 점입니다.
“커뮤니케이터, 마케터로서 중요한 능력은 스토리텔링 능력인데요. 스토리텔링이란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발굴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회사에 있을 때는 임원이다 보니 일선에서 사람을 만날 기회가 별로 없어지더라고요. 저는 직접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게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내 스스로가 제품과 서비스의 일부가 돼 고객의 반응을 직접 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정 씨는 트레이더조 크루로 일하고 싶은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 온라인 지원을 넘어 이력서를 직접 들고 매장에 방문하는 열정까지 보입니다. 두 시간에 걸쳐 면접도 봤고요. 그렇게 다소 까다로운 크루 선발 절차를 통과해 냈지만, 정작 첫 출근날에는 망설였다고 합니다. 30년 가까이 대기업 사무직으로 일해온 관성을 깨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제 육신이 이 육체노동을 견뎌줄지 겁이 나기도 했고, 전혀 다른 세상에 나가서 잘 동화될지 걱정도 되더라고요.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의 디렉터’에서 마음의 체면을 낮춰 한 명의 아르바이트생으로서 임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아요.”
갭 이어 기간 ‘아르바이트생’ 정 씨의 하루는 이랬습니다. 오전 3시부터 오후 1시 30분까지는 트레이더조에서 일하고요. 트레이더조 근무 중 부여된 1시간의 점심시간 동안에는 리프트 운전을 뜁니다. 트레이더조에서 퇴근한 뒤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스타벅스에서 일하고, 퇴근 후 가끔 펫 시터를 할 때도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오후 10시부터 자정까지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업무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실수를 엄청 많이 했습니다. 트레이더조 출근 첫날엔 딸기 상자가 스무 개 넘게 실린 카트를 밀다가 다 쏟아서 그날 마트의 딸기 장사를 망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실수를 하면 ‘내가 왜 굳이 이걸 하겠다고 했지’라고 후회했죠. 그래도 인생을 살아보니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동료들만 견뎌준다면 실수라는 경험을 통해서 또 배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워킹맘에게: 주변의 말에 귀를 닫으세요
모토로라코리아와 한국 릴리를 거쳐 구글까지 25년 넘게 쉼 없이 달리다 ‘갭 이어’까지도 아르바이트로 빼곡한 일정으로 소화했던 정 씨. 그 사이 정 씨의 아들은 성인이 됐습니다. 문득 워킹맘으로서 정 씨는 어떻게 살아왔을지 궁금해졌습니다.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의 도움으로 일과 육아를 동시에 해나갔지만, 고민을 안 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선택과 집중’입니다. 평소에 아이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적다면, 1박 2일 여행을 자주 떠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좋은 추억을 만들어 그 기억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알파맘’이 되려는 순간, 모든 스트레스와 죄책감을 자신이 다 안게 되거든요. 저는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라고 생각했어요.‘누구는 학원을 몇 개 보낸대’, ‘누구네 아들은 뭘 한대’라는 말을 들으면 불안해지니까 아예 귀를 막았어요. 저도 아이를 잘 키웠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키우는 과정에서 저도 행복했고 아이도 행복했다고 하니, 그걸로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해고당한 직장인에게: 자책하지 말고, 사람을 많이 만나세요
인터뷰 말미, 정 씨에게 ‘직장을 잃게 된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에 관해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실 누구도,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안 될 거예요. 정리해고라는 게 본인 잘못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거든요. 본인을 자책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자존감을 스스로 높여줘야 하는 게 되게 중요하고요. 또 권고사직이나 정리해고를 당하면 모든 사회적 관계를 끊는 경우가 많은데요, 오히려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위로를 받기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또 다른 도움을 얻기도 하거든요.”
하루에 3, 4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고, 여러 인터뷰에 응하며 여전히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 정 씨. 정리해고의 아픔을 빠르게 극복한 듯 보이는 모습에 기자는 그에게 짓궂은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다시 구글이 불러주면 간다? 안 간다?”
질문을 들은 정 씨는 잠시 뜸을 들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글에) 가서 제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식으로 나오고 싶어요.”
좌절을 극복한 것과는 별개로 애착을 가졌던 존재에 대해 미련이 남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람 마음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정 씨는 ‘이 부분은 꼭 넣어달라’고 당부하며 아래와 같이 한 가지 단서를 달았습니다.
“구글! (정리해고한 것) 나한테 사과해. 사과 안 하면 안 갈 거야!”
아침 식사가 왜 영어로 Breakfast인지 아시나요? Fast는 ‘금식’이란 뜻입니다. Break Fast는 ‘금식을 깬다’는 의미죠. BreakFirst는 이른 아침 당신의 허기를 가장 먼저 깨주는 뉴스레터입니다. 초심을 잊은 당신, 관성에 매몰된 당신을 위해 다양한 업계에서 ‘처음’을 만들어낸 이들을 만납니다.
매주 월요일 아침 발송되는 ‘관성을 깨는 1분, BreakFirst’ 뉴스레터를 구독하고 권태와 졸음을 영감과 혁신으로 채워 보세요. 뉴스레터에서는 인터뷰 영상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