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 난 레코드 화법’ 그리고 세계 차 없는 날[기고/전현우]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9월 10일 03시 00분



전현우 교통 철학자·작가
전현우 교통 철학자·작가
‘고장 난 레코드 화법’이라는 게 있다. 턴테이블이나 레코드 판이 고장 나면 한 부분만 계속 반복되는 것처럼 같은 주장을 무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핵심 메시지를 흥분이나 동요 없이 꾸준히 반복하면 그 자체로 설득 효과가 있다는 점을 노리는 것이다. 다만 설득력은 메시지가 얼마나 타당한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레코드가 튀면서 반복되는 소절이 매력적이어야 계속 듣고 있지, 그렇지 않으면 재생을 멈추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즘 고장 난 레코드 화법으로 반복되는 문구 중 하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가 아닐까 싶다. 주차공간이 부족한 지방 도시 KTX 역 앞에도, 자동차가 끝없이 밀려드는 추석 연휴 기간 사람이 몰리는 가족공원에도 적혀 있는데 대부분 뻔한 잔소리 정도로 취급되며 무시당한다.

이유가 뭘까. 아마 그런 곳들은 승용차로 10, 20분이면 오는데 버스로는 1시간 넘게 걸리거나 몇 번 환승을 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자동차 중 일부는 아예 대중교통이 없는 곳에서 출발한 차들일 수도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세요’라는 말은 어떤 이들에게는 바보가 되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이다. 10만 km 넘게 뻗은 전국의 자동차도로는 제주도의 2배가량인 3480㎢를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만 타면 전국 방방곡곡을 마음껏 누빌 수 있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사회에선 개인 몇 명이 자동차 이용을 자제한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 반복해 들어봐야 귀만 따가울 뿐이고, 말하는 사람도 시간 낭비다.

그렇다면 이제는 고장 난 레코드 화법을 활용하되 메시지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

‘더 나은 대중교통을 요구하세요’가 그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단순히 비용이나 시간을 줄이는 대신 우리 도시, 우리나라, 전 세계의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교통 시스템을 요구하자는 의미다.

이렇게 하면 대중교통을 개선해야 할 책임이 개인에게서 사회로 옮겨진다. 대중교통은 사회가 공유하는 시스템인 만큼 모두가 고민해야 조금씩 나아지는 공적 복잡계다. 골치 아파도 포기하지 않아야 더 나은 형태로 개선할 수 있다. 탄소배출량을 줄일 뿐 아니라 더 나은 도시와 삶을 만들 수 있다.

이달 22일은 ‘세계 차 없는 날’이다.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으로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사회, 보행자가 안전하고 쾌적하게 다닐 수 있는 거리를 상상하고 요구할 수 있는 날이다. 모두가 당장 동참할 순 없지만 생각과 말을 보탤 순 있다. 이날만은 차가 없어도 괜찮은 삶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 동네를 걸으며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어떨까.

#고장 난 레코드 화법#대중교통#지속가능성#교통 시스템#세계 차 없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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