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자체·기관별로 러닝크루 기준 고무줄
MZ세대 사이에서 러닝크루는 이미 새 문화
위계질서를 거부하는 MZ세대 맞춤형 운동
수십명이 함께 달리는 러닝 크루(달리기 모임)가 20~30대 사이에서 유행인 가운데, 일각에서는 민폐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8일 서울 서초구에 따르면 류모씨는 지난달 23일 공개 민원을 제기해 러닝크루를 단속하라고 요구했다.
류씨는 “반포종합운동장에서 팀 짜서 뛰는 러닝크루 분들이 트랙을 단체로 점유해서 4~5줄 차지하면서 걷는 분들에게 트랙 밖으로 비키라고 소리를 지른다”며 “생수를 몸에 뿌려 트랙이 다 젖게 하고 생수병을 내던지고 단체 사진 찍는다고 지나가는 사람들 못 가게 멈추라 한다. 사용료 내고 대여라도 했나 착각할 지경”이라고 밝혔다.
류씨는 “(반포종합운동장 안에서) 유료 수업하면 안 된다고 안내 방송 수 없이 들었는데 코치가 붙어서 같이 뛰는 게 뻔히 보인다. 그분들이 사람들에게 비키라 하고 사진 찍어주고 난리”라며 “트랙 밖은 인라인 도로와 자전거 도로인데 비키라고 소리 지르면 걷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라는 건지”라고 따졌다.
류씨는 그러면서 “반포종합운동장에서 몇 년 동안 걷기를 해왔는데 그동안은 걸을 사람 걷고 뛸 사람 뛰고 개별적으로 하니 큰 문제가 없었다”며 “계도 단속을 하지 않는다면 걷는 트랙과 뛰는 트랙을 나눠 달라”고 말했다.
이에 서초구는 러닝크루를 제재하겠다며 호응했다.
서초구 문화행정국 체육진흥과는 지난달 26일 답면에서 “우리 부서는 검토 끝에 5인 이상 단체달리기 제한이라는 특단의 이용규칙을 마련해 10월1일자로 시행할 예정”이라며 “트랙 내 인원 간 이격 거리를 2m 이상으로 규정하고 5인 이하 그룹에게만 그 예외를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구는 “트랙 내 특정 단체들이 뭉쳐 달리는 것으로 인한 신체적·심리적 위협 방지, 밀집도 완화에 따른 쾌적하고 안전한 운동 환경 조성, 유료 강습자의 자발적 이용 포기 등 여러 긍정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서초구는 지난 1일 반포종합운동장에서 5명 이상 단체달리기를 제한하는 ‘러닝 트랙 이용 규칙’을 시행했다. 민원 답변 내용대로 5명 이상 달리기를 하면 인원 간 간격을 2m 이상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혔다. 인근 송파구 석촌호수에도 3명 이상 달리기를 제한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반대로 러닝크루에 제재를 가하기 어렵다는 기관도 있다.
장모씨는 지난 4일 광진구에 있는 서울어린이대공원을 상대로 “이 분들이 초창기에는 이렇게 무리지어 달리진 않았는데 요즘 들어 다섯명씩 가로로 나란히 서서 우르르 무리지어 달리는데 좁은 길에서는 너무 위협적”이라며, “타 기관에선 적극적으로 떼 지어 달리는 행위를 금지시키고 있으니 참고해주셨으면 한다”고 민원을 제기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서울어린이대공원은 지난 7일 내놓은 답변에서 “우리 공원은 입장객 모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편의시설로서 서울특별시 도시공원 조례에서 규정한 금지행위에 한해서는 적절한 제재 및 관리를 하고 있다”며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는 집단 달리기에 대해서는 공원의 다른 이용객들이 불편을 겪지 않도록 적절한 현장 계도 및 안내 방송을 진행하도록 하겠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서울시 도시공원 조례와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은 금지 행위로 심한 소음 또는 악취가 나게 하는 등 다른 사람에게 혐오감을 주는 행위, 동반한 반려동물의 배설물을 수거하지 아니하고 방치하는 행위 등만을 금지하고 있다. 결국 서울어린이대공원은 러닝크루 행위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힌 셈이다. 이처럼 러닝크루를 둘러싼 행정당국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가운데 일각에서는 이들을 제재 대상으로만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제시된다. 이미 MZ세대들 사이에서 러닝크루는 하나의 문화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닝크루는 달리기를 의미하는 러닝(running)에 조나 모임 등을 의미하는 크루(crew)가 합쳐진 용어다. 달리기라는 공통의 목적을 갖고 서로 뭉친 집단을 뜻한다.
러닝크루 문화는 인스타그램 등 누리소통망(SNS)을 활발히 사용하는 20~30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운동 문화다.
러닝크루 참가자들은 주로 SNS를 통해 일정을 공유하고 의견을 개진한다. SNS나 오픈 채팅(카카오)에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 이름과 러닝크루를 함께 검색한 뒤 공지된 시간과 장소에 가면 된다. 자신의 러닝 인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것이 유행하면서 ‘런스타그램’, ‘런플루언서’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수년에 걸친 코로나19 확산이 러닝크루 유행에 영향을 줬다. 코로나 감염을 우려한 젊은이들이 실내 운동보다는 실외 운동을 주목했고 그 결과 운동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은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달리기는 다른 종목에 비해 비용이 적게 든다는 점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율)를 중시하는 MZ세대에 매력적인 운동이다.
러닝크루는 스포츠산업 측면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스포츠 브랜드 기업들이 MZ세대 러닝크루 참여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지역 러닝크루 이벤트, 러닝클래스 등을 운영하고 스포츠용품 지원, 러닝크루 커뮤니티 연계 마케팅 등을 운영하면서 우호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김경환(한국체대)·김일광(한국체대 교수)은 ‘밀레니얼 세대 러닝크루 참가자의 소비가치, 브랜드 트라이벌리즘 및 전환의도의 관계’ 논문에서 “러닝크루 활동을 하는 밀레니얼 세대들은 스포츠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표현하며 크루 내 회원들과 같은 패션과 브랜드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주된 특징”이라고 분석했다.
러닝크루는 위계 관계를 거부하는 MZ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문화이기도 하다.
과거 러닝 동호회는 나이가 계급이 되는 위계를 기반으로 형·동생으로 호칭을 정리하고 러닝 후에는 식사와 술자리를 한 후 사우나를 가는 암묵적 규칙이 있었지만 러닝크루들은 동료들의 나이 등 개인정보를 굳이 묻지 않는다. 러닝크루는 상하 관계가 확실한 직장 내 동호회를 거부하고 소속된 공동체 안에서 동등한 지위를 원한다.
강은석(동아대 교수)·허승은(을지대 교수)은 ‘카카오톡 채널의 러닝동호회 오픈채팅방 기능과 러닝크루 관계 변화’ 논문에서 “불필요한 개인정보 공유는 사절하고 위계질서가 사라진 평등한 러닝크루가 급증하고 있다”며 “러닝크루 간 취향과 관심사만 공유하는 ‘관계가 변화된 형태’로 발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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