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에 드리워진 ‘고령사회 그늘’] 〈下〉 유명무실한 노인 면허갱신 검사
“눈 안좋아 운전대응 능력 매우 저하”… 최하등급 판정에도 면허 갱신해줘
강서시험장 30명중 4명 ‘최하등급’… 공단 “운전 자제해달라” 권고만
경찰당국 ‘갱신 조건 강화’ 입장
“어르신, 오늘은 몇 월 며칠인가요? 지금 있는 장소는 어딘지 아세요?”
8일 서울 한 자치구의 치매안심센터에서 관계자가 한 노인을 대상으로 치매 선별 검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이날 검사를 받은 노인은 운전면허를 갱신하기 위해 센터를 방문했다.
약 10분 동안 진행된 검사에서는 오늘 날짜를 말하기, 지금 있는 장소 말하기 등 치매 가능성과 관련한 질문과 답변이 오갔다. 센터 관계자는 “이 검사는 간단한 인지기능 평가일 뿐 운전 능력과는 별개”라고 했다.
14일 한국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75세 이상 고령자는 3년에 한 번 운전면허 적성검사를 받아 면허를 갱신해야 한다. 2019년 개정된 도로교통법에 따른 조치다. 적성검사를 받으려면 우선 병의원이나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치매안심센터에서 치매 검사를 필수로 받아야 한다. 운전면허를 갱신하려는 고령자 대다수는 별도의 검사 비용을 받지 않는 지자체 치매안심센터를 이용한다.
문제는 치매 검사만 통과하면 공단에서 실시하는 적성검사에서 최하인 5등급을 받더라도 운전면허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행 제도하에서는 적성검사 결과에 따라 면허를 제한하거나 박탈할 법적 근거가 없다.
● 30명 중 4명이 최하 등급… “운전 자제” 권고뿐
같은 날 서울 강서구 강서면허시험장 3층 적성교육장 안. 유모 씨(75)는 도로교통공단에서 시행하는 의무교육을 받기 위해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았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이날 진행될 ‘인지 능력 자가진단 검사’에 대해 안내하면서 “이 결과는 면허 갱신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해당 검사 결과는 1∼5등급으로 분류되는데 최하 등급인 5등급을 받더라도 면허를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다.
자가진단 검사는 △교통표지판 판별 △방향표지판 기억 △횡방향동체 추적 △공간 기억 △탐색 등 주행 시 필요한 능력을 판단하는 다섯 가지 검사로 진행된다. 예컨대 서울, 대전, 대구 등을 가는 표지판을 보여준 뒤 간단한 산수를 시키고 이후에 ‘앞선 표지판에서 대전으로 가는 방향’이 어떻게 표시되어 있었는지를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이다. 자가진단 검사 5개 항목 중에서 단 하나라도 5등급을 받으면 종합 결과가 무조건 5등급으로 매겨질 정도로 중요도가 높지만 면허 갱신에 영향을 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이날 진행된 자가진단 검사에서 30명 중 4명이 5등급을 받았지만 모두 면허 갱신 대상이 됐다. 이날 유 씨는 ‘공간 기억’ 평가 시 오른쪽 화살표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 왼쪽이나 직진 화살표를 계속해서 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평소 눈이 좋지 않다”며 “모니터로 하니까 빨리 지나가버려서 당황했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5등급 판정을 받았다. 검사 결과지에도 “익숙한 도로에서도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혼동할 수 있어 위험 상황에 직면할 수 있음”, “운전 시 시야가 매우 협소하여 주변 차량의 움직임을 탐지하기 어렵고, 대응 능력도 매우 저하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 등의 판정이 나왔다. 도로교통공단은 종합 결과 5등급이 나온 고령자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버스나 지하철이나 택시, 가족이 운전하는 차량을 타라”고 권고했다.
적성검사의 실효성이 떨어지게 된 배경에 대해 경찰청 측은 “기존에는 공단에서 직접 인지 검사를 실시했지만 2019년 국민권익위원회가 ‘전문기관의 검사 결과로 인지 능력 진단을 실시하라’고 권고하면서 치매안심센터에서 검사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특별히 신체 및 인지 능력에 이상 징후가 없다면 추가적 시험 없이 면허를 갱신하는 기조가 유지되면서 고령자 면허 관리가 유명무실해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 고령 운전자 사고 급증… “실차 주행 검사 필요”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고령 운전자 사고는 급증하는 추세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는 3만9614건으로 3년 전인 2020년(3만1072건)보다 27.5% 증가했다. 이 때문에 도로교통공단에서 실시하는 ‘주행 인지 검사’ 등에 실질적인 주행 판단 능력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고령 운전자의 주행 능력을 판별할 수 없는 적성검사가 이대로 유지될 경우 도로 위 고위험군을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치매 검사와 함께 실제 차량 주행 검사를 병행해 적성검사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장효석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책임연구원은 “급가속, 급출발할 때나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고령자들이 어떻게 인지하고 행동하는지 평가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며 “치매 검사와 더불어 실차 주행 검사로 차선 변경을 정확하게 하는지, 돌발 상황이 발생했을 때 급정지를 할 수 있는지, 브레이크 밟을 힘이 있는지 등을 평가할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당국은 면허 갱신 조건을 강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조지호 경찰청장은 14일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고령자 운전면허 대책은 이동권이 전제된 상태에서 논의될 수 있는 것”이라며 “올해 말에 이와 관련한 연구 용역 결과가 나올 예정인데 이를 참고해 정책적 방향을 결정해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