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 줄 테니 맘대로 쓰라” 젊은이들 품은 감포항 어르신들 [그 마을엔 청년이 산다]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0일 08시 29분


지방 소멸에 맞서는 청년들의 이야기-11회
경주 ‘가자미마을’ 김미나 이미나 대표

인구 5000명이 조금 넘는 경북 경주시 감포항 마을엔 16일부터 아침부터 젊은이들이 북적댔다. 내년도 청년마을 지원대상 선정을 위한 행정안전부의 첫 설명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올해는 예산부족으로 지원대상을 선정하지 못했지만 내년에는 다시 예산이 배정돼 2018년부터 해마다 탄생해 온 청년마을의 ‘대가 끊겼다’는 우려를 지우고 새내기 마을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행사는 2022년에 선정된 경주 청년마을인 ‘가자미마을’을 운영하는 주식회사 ‘마카모디’가 주관했다. 마을과 주식회사 대표인 김미나 이미나 씨는 물론이고 영덕 고흥 강진 예천 완주 등 타 지역 청년마을 ‘선배 대표님’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예비 후배님들에게 정부 지원 청년마을로 선발되는 비법을 전수했다. 김 대표는 “경주 속 숨겨진 작은 항구마을 감포라는 보석을 찾아냈다”며 차별화를 주문했다.

경주 가자미마을 김미나 대표(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16일 카페 1925감포에서 발언하고 있다. 경주 감포항=신석호 기자.

행안부 청년마을로 지정되면 3년 동안 6억 원의 사업비가 지원된다. 이 돈으로 사무실과 숙소 등을 마련하고 타지 청년들이 찾아와 쉬고 놀며 사업과 새로운 인생을 구상할 수 있는 일을 돕게 된다. 김 대표가 이끄는 가자미마을은 외지 청년들이 가자미로 유명한 감포항 일대에서 낚시와 관광을 하고, 쉬면서 새로운 일을 구상하는 ‘워케이션’도 하고, 바다 폐기물을 함께 줍는 ‘플로깅’ 봉사도 하고, 지역 주민들과 지역살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마을의 센터이자 이번 행사가 열린 카페 ‘1925감포’는 일제강점기 감포 최초의 공중목욕탕이었던 신천탕을 리모델링해 만든 것이다. 1925는 감포항이 개항한 공식 연도. 지역 주민들과 외지 청년들은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기억을 담는 목욕탕 프로젝트’를 시작해 30년 이상 방치됐던 신천탕을 멋진 주민 공유공간으로 만들어냈다.

가자미마을은 지역 어르신들과 외지 청년들이 함께 힘을 모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다른 청년마을과 다르다. 어린이집 원장, 외항어선 선주, 체리와인점 사장, 보리밥집 주인 등 지역 어르신 6명과 경주 시내에서 활동하던 청년 주식회사 ‘마카모디’는 4년 전 인구가 줄어가는 감포항 일대를 살리기 위한 주민단체 ‘함께 가는 길’을 만들었다. 어르신들은 신천탕을 사들이고 어린이집 한 층을 비워 청년들에게 무료로 제공했고 이렇게 마련한 활동 공간을 근거로 가자미마을이 탄생한 것이다.

“김미나 대표 등이 2021년 행안부 청년마을에 지원했는데 사무실 공간이 없어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무상으로 공간을 구해 줄 테니 들어와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해보라고 했죠.”

경주 가자미마을에 사무실을 기증한 해원어린이집 서삼란 원장. 경주 감포항=신석호 기자.
경주 가자미마을에 사무실을 기증한 해원어린이집 서삼란 원장. 경주 감포항=신석호 기자.

그렇게 선뜻 해원어린이집 2층을 통째로 내어준 서삼란 씨(69)는 “빈 공간이 주는 무게가 나를 덮칠 판인데 청년들이 사무실로 쓰고 왔다갔다 하니 오히려 내가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서 씨는 1987년에 유치원을 시작해 1997년 3층 건물을 지어 어린이집을 열었다. 한 때 원아가 100여 명이 넘었지만 거주 인구가 줄면서 현재는 방과 후 학원으로 10명 정도의 원아들을 돌보고 있다.

“인구가 줄어가는 항구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려면 청년들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가 청년들이 계속 살 곳은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어요. 있는 동안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떠난 뒤엔 ‘감포가 참 좋았다’고 기억할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젊은이들은 감포를 떠난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김 대표는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감포에 들리도록 알리는 역할을 계속 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초중고 학교를 모두 경주에서 나온 토박이다. 대학에서 영상디자인학과를 전공한 뒤 대전에서 짧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4년 동안 인도 배낭여행을 떠나 티벳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국제NGO활동을 하기도 했다. 2014년부터 경주시내를 근거로 커뮤니티를 만들어 사람을 모아 재미와 의미를 함께 주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다. 주식회사 ‘마카모디’는 경상도 사투리로 ‘모두 모여라’라는 뜻이다. 공동대표인 이미나 씨도 그러다 만났다. 현재 직원은 모두 10명이다.

경주 가자미마을 김미나(왼쪽) 이미나 공동대표. 경주 감포항=신석호 기자.

“재미가 없으면 죽을 것 같다는 ‘ENTP’ 형이에요.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운 사람 만나고 질문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완성되지 않은 것을 완성시키는 것에 의미를 두고요. 그래서 직원을 뽑을 때도 완성된 사람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며 좋은 일을 해나갈 수 있는지를 봅니다.”

두 대표는 2019년 자본금 200만 원으로 창업해 2020년 중기부의 로컬크리에이터 사업자로 선정됐고 재수 끝에 2022년 행안부 청년마을로 승인된 것. 공유주거 사업자로도 선정돼 감포 인근에 청년 주거 공간을 더 마련하게 된다. 이 대표는 “감포항 일대가 지속가능한 마을이 되도록 앵커 조직으로서 사람들과의 연대를 키워가겠다”고 말했다.

동아닷컴은 연중기획으로 지방에 터를 잡고 주민들과 함께 지역 살리기에 헌신하는 젊은이들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도 좋고 이웃의 이야기도 좋습니다. 간단한 사연과 연락처를 이메일(kyle@donga.com)로 보내주세요.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가자미마을#청년마을#경주#감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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