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우릴 잊지 않았습니다” 참전용사 손녀가 감격한 이유[동행]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6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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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초, 스물다섯 튀르키예군 부사관 한 명이 전쟁 뒤 폐허가 된 한국 땅에 내렸다. 유엔군이 6·25 전쟁 후 남아서 전후 복구 작업과 대북 감시 업무를 수행할 때다. 그는 한국에 파견 보낼 인력을 모집하자 자원했다. 한국은 세계인의 눈에 여전히 전쟁 불씨가 남은 곳이었다. 그는 세 살 딸과 두 살 아들을 두고 있었다.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손녀 두이구 니한 아자르 씨(32)가 말했다.

“튀르키예 또한 투쟁 끝에 자유를 얻은 나라니까. 한국의 자유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참군인이기도 하셨다. 파견도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셨을 것이다.”

그 군인, 故 무자페르 아자르 씨는 1956년 2월부터 1년 5개월가량 한국에서 근무했다. 차량 정비 업무였다. 유엔군 일원으로 한국인들에게 관련 기술을 전수하면서. 폐허가 된 한국의 재건을 도왔다.

손녀에게서 사진으로 본 할아버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군인의 손녀는 대한적십자사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재건복구지원단에서 일하고 있다. 올해 1월 정식으로 채용됐다. 기자가 지난달 23일 지진 상흔이 남아 있는 튀르키예 동남부 가지안테프 지역을 찾았을 때 만났다. 지난해 규모 7.8 지진이 일어나 5만 명 넘게 숨진 지역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을 돕던 할아버지, 한국의 도움을 받아 튀르키예 복구를 돕는 손녀.

대한적십자사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재건복구지원단 직원 두이구 니한 아자르 씨(32)가 할아버지 부부 사진이 담긴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할아버지 故 무자페르 아자르 씨는 1956년 전쟁 후 복구 중이던 한국에 유엔군 소속으로 파병돼 전차 정비 등을 맡았다. 가족과 한국의 인연이 세대를 걸쳐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는 튀르키예에서 지진 피해가 컸던 동부 누르다이 지역 복구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뤄졌다.


한국 재건 도운 할아버지, 튀르키예 돕는 대한적십자사 직원 손녀
-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다.
“대한적십자사에서 일한다고 알렸더니, 아버지가 놀라더라. 할아버지로부터 한국 얘길 많이 듣곤 하셨는데, 이젠 딸까지 한국과 인연이 생겼으니까. 아버지가 운명적이라고 하더라. 아예 남편도 한국에서 찾으라고 한다.(웃음)”

-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할아버지는 군대에서 차량 정비를 맡았던 군인이자 기술자였다. 내게도 무언가 늘 가르쳐주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페인트로 벽 칠하는 법이라든지, 물건을 고치는 법이라든지. 남자아이 말고도 손녀인 내게도 말이다. 할아버지가 손자·손녀 중 가장 어린 나를 아껴주셨던 것 같다. 나도 그런 할아버지를 사랑했다. 엄격하면서도 자상하신 분이었다. 할아버지는 10여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늘 그립다.”

한국에서 복무 당시 무자페르 아자르 씨 모습. 튀르키예에 남은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자신이 어떻게 지내는지 사진을 담아 보내곤 했고 가족들은 그의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두이구 니한 아자르 씨 제공.

- 할아버지는 한국을 어떻게 기억하던가?
“할아버지는 한국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전쟁 중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라고. 한국 사람들은 정말 성실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래서 더 한국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셨다. 군대에서 사귄 한국인 친구와 같이 사진을 찍고 사진 뒤에 이름을 적어놓기도 할 만큼 한국을 애틋하게 생각하셨다.”

- 몹시 혼란스러웠을 때인데.
“그런 말씀도 했다. 한국에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폭탄이 터지고 길거리 싸움이 벌어졌고, 갈등이 많다고 말이다.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튀르키예로부터 배를 타고 두세 달이 걸릴 만큼 먼 곳이라고 말씀하셨던 기억도 난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튀르키예 군인들이 타고온 배를 수리하기 위해 애썼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더라.”

그는 한국에서 복무 중에 튀르키예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내곤 했다. 사진 뒤엔 그날 상황이 담긴 메모도 종종 적었다. ‘1956년 7월 26일 목요일 아침 경보가 울리자 철수’. 한국이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을 때다. 한국은 전쟁 후에도 유엔군의 도움 손길을 바랐다. 튀르키예군은 1966년까지 한국에 주둔했다.

대한적십자사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재건복구지원단
대한적십자사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재건복구지원단
- 그때와는 한국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도 아셨나?
“언젠가 할아버지가 TV로 서울의 발전상을 보신 적이 있는데 ‘저기가 한국이라니 믿을 수 없어’라고 말씀하셨다. 한국이 그만큼 정말 많이 발전하고, 달라진 것이다.”

손녀 두이구 니한 아자르 씨(앞줄 가운데)와 무자페르 아자르 씨(앞줄 오른쪽)가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두이구 니한 아자르 씨 제공.

- 가족과 한국의 인연이 깊다. 대한적십자사에선 어떻게 일하게 됐나?
“지난해 큰 지진이 난 후,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에서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 먼저 일했다. 그러다가 튀르키예를 지원하러 온 한국 분들을 만났는데 그때 대한적십자사에 일자리가 났다고 들었다. 그 자리가 가족과의 인연 때문에 더 관심이 가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한국에 대해서 말씀해주셨으니까. 대한적십자사가 튀르키예 국민들을 돕겠다는 점도 그렇고.”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지진 이후 이재민 돕기 성금으로 402억 원을 모았다. 당초 200억 원을 목표로 했는데, 예상보다 두 배가 더 모인 것이다. 사망자 5만 명 이상, 부상자 11만 명 이상, 이재민은 2300만 명에 달할 만큼 극심한 피해를 남긴 최악의 자연재해에 인도주의의 손길을 내민 사람들이 그만큼 많았다. 한국인이 이재민 돕기에 진심이었던 이유는 또 있다. 대한적십자사 관계자는 “어려운 시기 한국을 도와준 데 대해 보답하려는 마음을 담아 성금을 보낸다고 말씀하신 기부자도 많았다”고 전했다.

워낙 큰 구호금이 모인 만큼 대한적십자사는 지원 활동을 챙기고 점검할 현지 행정 직원이 필요했다. 이미 국제적십자사연맹(IFRC)에서 같은 직무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아자르 씨가 적격이었다.

채용 면접 때 한국과의 인연을 밝혔다면 도움이 됐을 텐데, 아자르 씨는 할아버지가 6‧25에 참전했다는 사실을 밝히진 않았다고 한다. 당시 면접을 맡았던 김재율 대한적십자사 국제협력팀장(당시 튀르키예 대표단장)은 채용 후에야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었다. 김 팀장은 “그런 사연이 있었느냐”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피해 현장, 사람 살던 곳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
- 지진이 일어난 날 어땠는지 기억하나?
“두 번째 지진(규모 7.5)은 집이 있는 앙카라에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지진 피해 소식과 상황을 TV로 들었다. 피해가 무려 11개 주에 걸쳐 일어났다. 지진 피해자들이 물도 전기도 없는 곳에서 버티면서 잘 곳도 찾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괴롭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튀르키예 사람들도 다 그랬을 것이다.”

아자르 씨가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본 튀르키예 지역 소상공인 부부를 만나 복구 상황을 듣고 있다. 사진=임현석 기자.
아자르 씨가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본 튀르키예 지역 소상공인 부부를 만나 복구 상황을 듣고 있다. 사진=임현석 기자.
- 지진 피해 현장도 찾았을 텐데
“지진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방법을 찾았고 지난해 3월 국제적십자연맹에 직원으로 합류했다. 피해가 일어난 곳을 찾아가 보니, 폐허와 잔해뿐이었다. ‘여기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던 곳이 맞나’라고 묻게 되더라. 사람 살던 곳이라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황폐하더라. 지진이 일어나던 순간과 폐허로 변해버린 곳을 찾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 말하기가 힘들 정도다. 나를 비롯해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아직도 다 회복이 되지 않았다.”

- 한국에서 모인 성금이 도움이 됐을까.
“물론 그렇다. 성금 덕분에 대규모 임시주거시설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규모 급식 시설과 위생 관련 시설을 짓고 차량 지원도 이뤄졌다. 1000개 컨테이너로 설비를 갖춘 ‘우정의 마을’도 만들었다. 큰 피해를 본 소상공인을 지원하는 데에도 쓰이고 있다. 정말 피해자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컨테이너 숙소가 정식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필요한 가구나 시설이 갖춰져 있어서 겨울과 여름을 버틸 수 있는 곳이다.”

우정의 마을은 튀르키예 지진 피해가 특히 컸던 카르만마라쉬 파잘직 지역에 세워졌다. 컨테이너 숙소 한 동은 4인 가구 기준으로 제작됐으며, 국내 가전제품과 가구로 채워졌으며 생필품과 식료품을 지원하고 있다.

아자르 씨가 튀르키예 파잘직 지역 내 ‘우정의 마을’에서 지진 이후 수업 프로그램에 참여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대한적십자사 제공.
- 한국 성금 지원을 받은 분들은 어떤 말씀을 하시나?
“우정의 마을에서 머무는 분들은 한국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 덕분에 여기 있을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한국에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을 알고 감사한 마음을 우리에게 늘 전하고 있다. 한국 성금 지원을 받고 고마워하는 분들을 보면, 우리가 정말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니, 성금을 낸 분들이나 대한적십자사 분들이나 모두 보람을 느낄 법하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이곳 우리 아이들은 한국인이 건넨 도움을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 세대가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것처럼.”

- 한국이 전쟁으로 어렵던 시기, 튀르키예가 도움을 줬다. 튀르키예 재건은 한국이 돕는다. 각별한 인연이다.
“한국은 튀르키예가 힘들 때 잊지 않고 기억해줬다. 튀르키예가 한국을 도울 땐 이런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 분들은 아마 보답해야 한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오랜 세월이 지나도 형제애는 남는다.”

- 한국과 함께 피해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어떤 느낌을 받나?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나?
“한국에서 받은 도움 덕분에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어려운 시기에 서로 돕고 있는데, 미래에 좋은 날도 같이 누렸으면 좋겠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마지막 대답을 듣는 동안에 바람이 불었고, 그 탓에 녹화 용도로 쓰던 스마트폰 촬영 삼각대가 쓰러졌다. 내가 잠시 인터뷰를 멈추고 스마트폰을 바로 세우려고 하자 아자르 씨가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거 삼성 아니죠? 삼성이면 그렇게 금방 쓰러지질 않을 텐데. 삼성 쓰세요.” 아자르 씨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였다.



동아일보와 대한적십자사는 지난해 큰 지진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 내 임시 거주처 등을 지원하기 위한 후원 캠페인을 펼치고 있습니다. 모금액은 기부금품법에 의해 관리되며 사용 내역은 대한적십자사 기부금품 모집 및 지출명세를 통해 공개됩니다. 아래 링크와 QR코드를 통해 지원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redcross.or.kr/donation_participation_v2/donation_participation_onetime.do?action=onetimeFormNew&no=12245&suc=o0012245



#동행#한국 재건#튀르키예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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