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깜빡이가 필요해[소소칼럼]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0월 29일 16시 40분


장롱면허에서 탈출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운전대를 잡는 상상만 해도 마음이 졸아들곤 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멀리 떠나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악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거나 옆차선 넘지 않고 우회전, 좌회전 하는 것은 웬만큼 익숙해졌다. 하지만 옆에서 끼어드는 차들에 마음 졸이는 것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적응이 안 된다. 앞차에 바짝 달라붙는 게 익숙하지 않은 초보 운전자 앞으로 끼어들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잠깐 벌어진 틈을 타 대가리부터 쏙 들이미는 차들에 놀란 가슴 쓸어내리고 나면, 짜증이 밀려든다. 따라붙어 클락션이라도 울려주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끼어들곤 비상깜빡이를 켜는 차들이 더러 있다. 그러면 갑자기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른바 ‘비깜 사과’로, 비상깜빡이를 두세 번 켜는 것은 ‘미안합니다’ 혹은 ‘고맙습니다’라는 뜻이 담긴 운전자들의 암묵적인 신호라고 한다. 일본에서 유래했다지만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다니 ‘뻑큐’처럼 만국공통이면서도 효과적인 셈이다.

운전을 하다 보면 사소한 일에도 쉽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운전자들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상대 운전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없고, 별 생각없이 한 행동도 공격적인 것으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운전자들은 앞차의 뒷모습, 두 후미등과 브랜드 로고, 번호판이 각각 눈코입을 맡아 만드는 얼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인상이 선한 것들이 별로 없다. 제네시스 GV70은 눈이 양옆으로 주욱 찢어진 게 꼭 날 쏘아보는 것만 같다. 아반떼와 코나는 미간이 좁고 눈꼬리가 올라가 어딘가 표독스러워 보인다. 티볼리나 옛산타페는 철없는 사촌 동생처럼 깐족댈 것만 같다. 그런 얼굴로 끼어드니 화날 수밖에. 하지만 막상 그런 차를 모는 사람을 보면 예상했던 이미지와 달라 무안한 순간이 많다. 비상깜빡이는 차들의 심술궂은 얼굴 너머 그것을 누른 운전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비상깜빡이 사과에 감동을 받는 이유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했다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어차피 저 운전자는 몇 초만 지나면 헤어져 다시 볼 일 없다. 서로 얼굴도 모른다. 비매너 행동을 한다고 해서 뒤에서 들이박을 것도 아니다. 그냥 모른척 도망가면 그만인데 굳이 손을 뻗어 비상깜빡이를 눌러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뭉클하다. 마음이 순식간에 녹아내린다. 그런 마법을 경험한 뒤로는 나도 습관처럼 비상깜빡이를 누르고 있다. 습관이 되니 꼭 미안한 상황이 아니어도, 끼어들 만해서 끼어든 순간에도 누르게 된다. 비상깜빡이와 뒷유리에 붙인 초보운전 딱지가 버무려지면 ‘고맙습니다’라는 신호가 ‘저 같은 초보 운전자를 위해 양보해주셔서 정말정말 감사합니다’가 된다. 뒷차에 타고 있는 수십 년 경력의 중년 운전자가 ‘짜식 예의바르네’하며 미소짓는 상상을 하면 인류애 같은 게 차오른다.

한순간에 사람 마음을 녹이면서도 별다른 품이 들지 않으며, 범용성도 큰 이 신호에 매료되니 일상 속에도 이런 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도로만큼 오해가 많이 생기는 곳은 SNS 공간인 것 같다. 온라인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상대가 보낸 메시지의 저의를 자꾸 넘겨짚게 된다. 이 공간에서는 한순간에 배려가 간섭으로, 걱정이 감시로, 호기심이 의심으로 탈바꿈하고 만다. 별생각 없이 던진 한줄 메시지에 날카로운 클락션이 날아든 경험은 누구나 해봤을 경험이다. 일을 할 때도 그렇다. 꼼꼼한 것은 때론 무례한 것이 되고, 효율적인 보고에서 게으름이 읽힌다. 평소 얼굴을 잘 아는 사이에서도 그런데, 새로 가까워진 취재원이나 갓 입사한 막내들과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특히 더 신경이 쓰인다. 물론 더 신경을 쓴다해봤자 끝에 ‘ㅋㅋ’ ‘ㅎㅎ’ 같은 걸 더 붙이는 것뿐이지만.

온라인에서 생긴 오해는 풀기도 쉽지 않다. 오해가 쌓인채로 대화는 이어지고, 오해한 쪽이 받은 쪽을, 그 뒤에 다시 받은 쪽이 한 쪽을 몰아세우며 좋지 않은 감정이 증폭된다. 한 번 틀어진 마음은 현실에서도 풀기 쉽지 않다. 한 선배는 그런 순간에는 곧장 전화를 걸어 오해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비기(秘技)를 전했다. 물론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품이 너무 많이 들지 않나 싶다. 비상깜빡이처럼 쉽고 간단하게 오해를 풀 장치는 없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뀨’나 ‘헿’ 같은 무해한 단어들이나 활짝 웃는 이모티콘 같은 게 비상깜빡이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것들은 아무 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심한 누군가에게는 심적으로 중대한 도전이 될 수 있다. 단순히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똑같이 비상깜박이를 만들면 어떨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버튼을 누르면 메시지나 프로필 테두리가 노랗게 번쩍이는 것이다. ‘충분히 오해할 만한 메시지인데 그런 의도는 절대 없으니 혹시 오해했다면 용서해주길’ 같은 뜻이 담긴 신호로서 말이다. 먼훗날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빅데이터를 토대로 자주 오해의 단초가 되곤 하는 메시지 테두리에 자동으로 비상깜빡이를 넣어주는 기능도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혹은 ‘자동완성’ 기능처럼 오해가 없도록 실시간으로 문장을 수정해주는 기술도 나올 것만 같다. 물론 그런 허무맹랑한 상상들 끝엔 ‘그냥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게 제일 낫다’는 원시적인 해결책만 남는다. 작은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고 뉘앙스와 맥락을 파악해내는 우리 본연의 능력은 많은 오해를 순식간에 불식시켜왔다.

다행히 SNS 공간에선 프로필 사진을 설정해둘 수 있다. 서로 얼굴 맞대고 대화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부끄러워도 웃상인 얼굴 자꾸 걸어놓으려는 것에는 말이 왜곡되지 않고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래도 텅 빈 프로필보다는 오가는 말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준다는 지론이다. 그나저나 날이 쌀쌀해지며 여름철 내내 걸어두었던 사진을 내렸는데, 살찐 뒤로 찍어둔 사진이 없어 난감한 요즘이다. 당분간은 ‘뀨’를 더 많이 쓰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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