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법 개정안 28일 본회의 처리”
적국인 北에 국가기밀 누설 넘어
中-日 등 정부-단체에 넘겨도 처벌
재계 “기술전쟁속 유출 방지 기대”
“용돈벌이나 하자.”
국군정보사령부 공작팀장을 지낸 뒤 퇴직한 홍모 씨는 2013년 전후 당시 공작팀장이었던 후배 황모 씨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현직인 황 씨가 기밀 문건을 열람한 뒤 홍 씨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홍 씨가 사진에 찍힌 내용을 다시 자필로 받아적어 문건을 유출하는 식이었다.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북한의 핵탄두 개발 동향’과 ‘블랙요원 명단’을 비롯한 극비 문건을 확보했다. 그리고 이 문건들을 일본 무관들과 중국 정보원들에게 건넸다.
이들은 돈을 받고 중국과 일본의 ‘스파이’ 역할을 했지만 간첩 혐의로 처벌받지는 않았다. 형법의 간첩죄는 ‘적국’인 북한을 위해 국가 기밀을 누설한 사람만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19년 군사기밀보호법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황 씨와 홍 씨에 대해 각각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여야가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에서 북한을 뜻하는 적국뿐 아니라 ‘외국 및 이에 준하는 단체’를 위한 간첩 행위도 간첩죄로 처벌하는 간첩법(형법 98조) 개정안을 통과시키면서 홍 씨 같은 사례들을 간첩죄로 처벌할 길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 중국 위해 정보 수집해도 간첩 처벌 길 열려
개정안은 이르면 이달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면 6개월 유예 기간을 거친 뒤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신설됐던 ‘간첩죄’가 71년 만에 처음으로 개정되는 것.
개정안은 ‘간첩 행위’를 적국이나 외국의 지령, 사주, 의사연락 등을 받아 국가기밀을 탐지·수집·누설·전달·중개한 행위라고 분명히 했다. 국회 법사위 여당 간사인 국민의힘 유상범 의원은 “내부 기밀 유출뿐 아니라 사이버 해킹 등 정보 수집 행위 자체를 처벌할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간첩 피의자들이 수사기관을 따돌리기 위해 중국인 단체 등을 통해 북한에 주요 정보를 우회적으로 넘기는 행위에 대해서도 당국이 수사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사정당국 관계자는 “피의자가 중국인에게 기밀을 넘긴 경우 이 기밀이 북한으로 흘러간 것으로 의심되더라도 추가 수사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며 “유출 정보 종착지에 대해서도 수사할 근거가 생긴 것”이라고 했다.
법 개정안은 ‘외국 정부에 준하는 단체’에 대한 간첩 행위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만큼 하마스, 헤즈볼라를 비롯한 무장단체나 이슬람국가(IS) 등 외국의 테러단체에 기밀 정보를 유출한 경우도 처벌할 수 있다.
● 기술 유출 산업스파이 간첩죄 적용 가능
간첩법이 시행되면 중국이나 일본 등에 과학, 산업 기술 관련 정보를 팔아넘기는 ‘산업 스파이’ 행위도 형법상 간첩 혐의로 처벌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 대한 간첩 행위를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하도록 한 만큼 처벌 수위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군사 기밀을 유출한 피의자에게 주로 적용돼온 군사기밀보호법은 기밀 누설자에 대해 1년 이상의 징역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2019년부터 올 8월까지 군사기밀보호법위반 혐의로 유죄가 선고된 판결문 13건 중 실형이 선고된 건은 2건에 불과했고 전부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재계는 기술 유출을 막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첨단 기술 확보를 위한 글로벌 경쟁 과정에서 국내 첨단 기술을 탈취하려는 외국의 시도가 빈번해지는 현실을 반영한 법안 개정”이라고 했다.
수사를 받고 있는 피의자들에 대해서는 개정법에 따른 간첩 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 최근 경찰은 부산에 입항한 미 항공모함을 비롯한 군사시설 사진을 불법 촬영한 중국인 유학생 3명을 적발했지만, 이들에게는 간첩 혐의가 적용되지 않는다. 개정된 법 시행 이전에 벌어진 범죄에 소급 적용하는 것은 위헌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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