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커피는 무슨”…음독사건 그 후, 여전히 ‘안전 사각지대’ 놓인 경로당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11월 22일 16시 18분


노노(老老)학대 10년 새 3배로 증가…“CCTV 설치 등 안전대책 마련해야”

“커피는 무슨, 흉측해 냉장고까지 바꿨는데….”

이달 초 찾은 경북 봉화군 내성4리 여성경로당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요즘도 냉커피를 나눠 드시냐”고 기자가 묻자 이같이 답했다. 이 경로당에서는 올해 초복 날 한 회원이 몰래 살충제를 섞어 놓은 냉장고 안 커피를 나눠 마신 할머니 4명이 농약에 중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피해 할머니 가운데 일부는 심정지와 같은 위급한 상황을 맞기도 했다. 피의자로 지목된 80대 여성이 같은 성분의 살충제를 마신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결국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됐다.

이날 경로당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할머니들은 이제 커피를 나눠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흉측해 보기 싫다며 냉장고까지 바꿨다고 한다. 경로당 내외부를 비추는 폐쇄회로(CC)TV는 없었고 2층 남성경로당은 비어있었음에도 문고리가 잠겨있지 않았다. 남성경로당 복도에 놓인 냉장고는 누구나 쉽게 열어볼 수 있었다. 경로당 앞에서 만난 주민 김모 씨(57)는 “CCTV만 달려있었어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고 했다.

최근 경북 봉화군 내성4리 여성경로당 앞. 폐쇄회로(CC)TV가 여전히 설치돼 있지 않은 가운데 적막감이 흐른다. 봉화=명민준기자mmj86@donga.com

● 노인시설은 안전 사각지대

한국 사회가 초고령화 사회로 접어든 가운데 노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경로당이나 마을회관 등에서 강력사건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범죄 예방을 위해 근본적인 제도개선이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린이집, 노인요양시설처럼 CCTV 설치를 의무화하도록 법령을 개정하거나 노인 간 갈등을 막을 매뉴얼 등 예방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다.

22일 대한노인회 등에 따르면 현재 노인여가복지시설 관계 법령인 노인복지법, 지방자치법에서는 경로당, 마을회관 등에 대한 CCTV 설치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다. 관련 지원 근거도 없는 상태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로당과 마을회관에는 CCTV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현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시설 자체적으로 CCTV를 설치한 곳이 있지만 사실상 관리 주체가 따로 없어 고장난 상태로 방치돼 있는 곳도 많다. 음독 사건이 벌어진 봉화 내성4리 경로당에도 원래 CCTV가 설치돼 있었지만 관리자가 없어 무용지물이 됐다고 한다. 기자가 대구 경북 지역 경로당과 마을회관 10여 곳을 둘러본 결과 대부분 CCTV가 설치돼 있지 않거나 한누에 봐도 방치돼 있었다. 잠금장치조차 제대로 결속돼 있지 않은 곳도 많았다.

경로당, 마을회관의 CCTV 미설치 문제는 강력 범죄 위험성을 높이면서 미제사건까지 양산하고 있다. 2012년 1월 전남 함평군의 경로당에서는 노인 6명이 비빔밥을 나눠 먹은 뒤 쓰러졌고 1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누군가 쌀밥에 살충제를 섞은 것으로 조사됐으나 CCTV 등 수사자료 부족으로 미제사건으로 남았다. 2016년 사망자가 발생한 경북 청송군 마을회관 농약소주 사건도 CCTV 부재 등으로 경찰이 초동수사부터 난황을 겪었다. 특정했던 용의자가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앞두고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CCTV는 사건 예방효과와 더불어 사건 수가 기간도 현저히 줄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로 접어든 만큼 노인이용시설에 대한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고 말했다. 봉화 농약커피 음독사건을 수사한 경북경찰청은 보건복지부 등에 CCTV 설치 근거 마련을 위한 관련법 개정을 권고한 상태다.

노노 갈등 연도별 추이
연도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2022
2023
건수
1374
1562
1762
2026
2190
2525
2699
3144
3934
3865
4088
노인여가복지시설 내 노노 갈등 연도별 추이
연도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2022
2023
건수
42
44
57
16
16
41
131
92
87
52
108
65세 이상 강력범죄자 연도별 추이
연도
2013
2014
2015
2016
2017
2018
2019
2020
2021
2022
2023
건수
15278
17072
19637
21285
22158
24014
26678
27086
26041
28130
30284

최근 경북 지역의 한 경로당 출입문이 잠금장치가 잠겨있지 않아 쉽게 열리고 있다. 명민준 기자mmj86@donga.com
● 노인 간 학대 사건 10년새 3배로

행정안전부가 올해 발표한 65세 이상 주민등록인구는 1000만62명으로 사상 처음으로 1000만 명을 넘겼다. 한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노인인 셈이다. 노인 인구 비율은 앞으로도 가파르게 증가할 전망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세계와 한국의 인구 현황 및 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2072년 65세 이상 인구 비중에 47.7%에 달하면서 인구 절반이 노인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노인 인구 증가 속도에 따라 경로당이 늘고 있지만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경로당 수는 6만8792곳으로 경로당 1곳당 약 145명을 수용해야 하는 상태다. 최근에는 곳곳에 고령층의 출입을 거부하는 ‘노(NO) 실버존’까지 생겨나고 있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이 경로당 등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한 곳에 모여 공동 생활을 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노인 특성상 사소한 시비가 괴롭힘 등 학대행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실제로 노인 간 갈등으로 인한 노인왕따 등 이른바 ‘노노(老) 학대’ 건수는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복지시설 현황에 따르면 60세 이상 기준 노노학대 건수는 2013년 1374건에서 지난해 4088건으로 10년 새 3배 가까이로 증가했다. 특히 경로당 등 노인여가복지시설 내 왕따와 폭력 등 노노학대 건수는 2013년 42건에서 지난해 기준 108건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경찰은 노인들 간의 갈등이 장기간 누적될 경우 우발적인 강력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실제로 2000년대 들어 경로당과 마을회관 등에서 발생한 농약 음독 사건 등은 대부분 노인들 간의 일상적인 다툼이 불씨가 돼 극단적인 결과로 이어졌다는 한다. 고령범죄자수는 갈수록 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65세 이상 고령범죄자수는 2013년 7만7260명에서 지난해 13만5483건으로 2배 가까이 증가했다. 같은 기간 폭력, 살인 등 폭력 및 강력 범죄를 저지를 고령범죄자수는 2013년 1만5278건에서 지난해 3만284건으로 2배가량 늘었다. 한 노인복지기관 종사자는 “노인분들끼리 사소한 시비가 큰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앞으로 초고령사회를 대비해 노인 시설 내 CCTV와 전자 시건장치 등 안전망 확충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노인 간 갈등 해결을 위한 갈등 방지 매뉴얼과 관련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온다. 대한노인회에서 노인 간 갈등 해결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나 효과는 뚜렷하지 않다는 지적은 여전하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저마다 살아온 인생이 다른 노인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중재할 수 있도록 사회복지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해 갈등 매뉴얼을 마련해야 한다”며“노인들이 한 곳에만 오랜 시간 동안 머무르게 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노인은 주체적인 사회 구성원의 일부라는 인식 변화를 이끌어낼 만한 프로그램이나 정책이 마련되야 한다”고 말했다.

#경로당#노노학대#노인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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