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기소, 재판 등 사법 작용의 대상이 되는 일’. ‘사건’의 사전적 정의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는 이 순간에도 사건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아일보 법조팀 기자들이 전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 중, 아직 알려지지 않은 사건 이야기들에 대해 더 자세하게 풀어보겠습니다. 다섯 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왜… 갑자기 진술이 달라졌지…?”
올해 2월. 유난히도 추운 겨울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사건 기록을 살펴보던 울산지검 김효준 검사(36·변호사시험 5회)의 손이 느리게 멈췄다. 1심 판결이 끝나고 2심을 준비하기 위해 넘겨받은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피고인 A 씨는 함께 살던 동거녀와 성관계하는 모습을 동거녀의 자녀에게 강제로 보게 한 아동학대 혐의(아동복지법 위반)로 1심에서 벌금형을 받았다. 동거녀 김모 씨는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을 땐 “A 씨가 자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성관계 장면을 강제로 보게 한 것이 맞다”고 진술했었다. 그런데 정작 법정에서는 “사실 검찰에서 한 말은 거짓말”이라며 기존과 180도 바뀐 증언을 했다.
2심 재판 단계부터 사건에 참여한 김 검사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이 사건은 다시 시작됐다.
● 4년 만에 드러난 범죄 행위
먼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A 씨와 김 씨는 2016부터 2019년까지 3년간 동거를 했다. 당시 김 씨의 11살 자녀도 함께 살았다. A 씨와 김 씨가 성관계를 가지던 도중 이를 알지 못했던 아이가 방문을 열었고, A 씨는 아이가 거부하는데도 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계속 보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A 씨는 불법 성인 동영상을 보는 본인의 모습을 아이에게 지켜보게끔 하면서 추가적으로 정신적 학대를 가하기도 했다.
김 씨는 지적장애가 있었다. 신고 없이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은 김 씨의 자녀가 담임 교사와의 상담과정에서 이를 털어놓으면서 진상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됐다. 아이는 울면서 “사실 어렸을 때 당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너무 힘들다”며 교사에게 토로했다. 교사는 아동학대 상담 기관에 이 사실을 전달했고, 기관이 경찰에 신고하며 수사가 시작됐다.
사건 기록을 검토하던 공판 검사의 눈에는 용기를 내 신고하게 된 피해자 측의 진술이 갑자기 법정에서 뒤바뀐 상황을 확인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위증 그리고 위증교사는 보통 사건 당사자들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피해자가 위증하거나 피고인의 위증교사가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 피해자에 진심 어린 설득 “사실 밝히는 마지막 기회”
“저희 아이가 옛날에 거짓말한 거예요. 2019년에 A 씨와 헤어질 때 A 씨한테 쫓겨나듯 나왔거든요. 그러면서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나쁜 생각이 들어 혼내줘야겠다는 마음에 저도, 저희 아이도 당시 거짓말로 진술했습니다.”
김 씨는 검찰청에 와서도 법정에서 한 증언을 똑같이 반복했다. ‘그럼 1심 재판 전 수사기관에서는 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도 김 씨는 “A 씨가 저랑 동거하면서도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운 다음, 추운 겨울에 저희를 쫓아내서 너무 화가 나 거짓말로 신고하기로 한 것”이라는 대답을 했다. 마치 짧게 암기한 내용을 반복해 말하기라도 하는 듯 같은 진술만을 되풀이한 것.
항소심 재판부터 사건에 투입된 김 검사였지만 답변 내용은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A 씨의 항소이유서와 같은 내용을 녹음 테이프를 재생하듯 김 씨가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A 씨는 1심에서 일부 유죄 판결에 대해 불복해 항소를 한 상황이었다. 이때 법원에 제출한 A 씨의 항소이유서에는 김 씨의 법정 증언과 똑같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항소이유서에는 “추운 겨울에 내쫓은 저에게 앙심을 품고 동거녀와 그 자녀가 수사기관에서 거짓으로 진술하였으며…. (중략) 1심에서의 판단은 억울하고…” 등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김 검사는 재차 조사를 이어갔다. “혹시 A 씨가 이렇게 말하라고 그대로 시킨 건 아닌가요?”
처음엔 입을 열지 않던 김 씨였지만 담당 검사의 설득과 지적에 차츰 사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본인이 위증한 것이지, 위증 교사가 있던 것은 아니라고 극구 부인했다. 김 검사는 ‘그럼 딸은 왜 학교 상담에서 갑작스레 울며 그런 트라우마를 털어놓은 것인지’ 재차 물었다. 김 씨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쉽게 답하지 못했다.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던 장애인 복지기관의 상담사도 여기서는 사실만을 말해야 한다고 같이 설득했다.
3시간쯤 지났을까. “이렇게 끝나면 사실을 밝힐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검사의 이 말에 김 씨는 그제야 A 씨로부터의 위증교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날 A 씨로부터 전화가 오더라고요. (본인이) 큰 벌 받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부탁하니까 솔직히 불쌍한 마음도 들고…”
● 통화 기록이 말해주는 그날의 상황
김 씨의 자백 등을 토대로 이 사건은 아동학대에서 위증교사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전환됐다. 우선 검찰은 김 씨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 등을 분석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수상하리만치 몰려있는 통화내역을 발견했다.김 씨의 1심 증인 재판 출석이 예정된 날부터 그 전 1주일 사이에 수상한 통화가 몰려 있는 점이었다. A 씨가 제3자에게 전화를 걸면 곧바로 제3자가 김 씨에게 전화를 거는 패턴이 반복된 것. 수사 결과 A 씨는 검찰이 위증교사를 의심할 것을 대비해 김 씨에게 연락할 때는 본인의 휴대전화가 아닌 제3자의 휴대전화를 빌려 연락한 것이었다.
또 김 씨가 법정에서 위증을 한 날에도 수상한 통화 내역이 남아있었다. 기지국 위치 등을 분석한 결과 A 씨와 김 씨가 법원 내에서 만난 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법정에 들어가기 전 그리고 후에도 서로 만나 입을 맞춘 것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검찰이 항소심을 앞두고 김 씨에게 조사 통보를 하자 ‘A 씨-제3자-김 씨’로 이어지는 통화 패턴이 다시 발견되기도 했다.
추가로 결정적인 증거도 확보됐다. 검찰이 김 씨의 노트를 확보했는데 여기에는 A 씨가 김 씨를 만나 “불러주는 대로 적으라”며 “이 내용을 그대로 외워 진술하면 된다”고 강조한 내용 등이 적혀 있었다. 법정에서 김 씨가 위증했던 내용, A 씨가 항소이유서에 적은 바로 그 내용이었다.
● 檢, 아동에게까지 면담 강요한 혐의 포착
추가 수사가 이어지자 A 씨의 전방위적 위증교사 행위가 속속 드러났다. 1심 재판에서 김 씨가 증인으로 불려간 날, A 씨는 김 씨를 따로 만나 종이를 넘겨주며 “내가 써준 내용을 잘 암기해서 재판에 들어가라, 암기하고 잘 마치면 끝나고 고기 사주겠다”라며 지적장애가 있는 김 씨를 회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항소심 재판을 앞두고는 김 씨에게 “2심은 판사가 3명이다”, “3명이니 더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등으로 위협한 것으로 나타났다.
A 씨는 1심에서 무죄가 아닌 벌금형의 유죄를 선고받았는데 김 씨의 자녀가 ‘위증’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고, 2심 법정에서는 꼭 아이까지 증인으로 나와 “나를 위해” 증언을 해줘야 한다고 김 씨에게 강요를 했다. 동거녀었던 김 씨뿐 아니라 자녀에게까지 면담을 강요한 사실 등이 추가로 발견된 것이다.
김 씨는 검찰 조사과정에서 “딸에게 검찰에 가서 사실대로 다 말했다고 했더니 딸이 엄마가 진실대로 말하는 거 응원한다”며 그간의 사정을 털어놨다. 그러면서 “그래서 둘이 끌어안고 막 울었다. 거짓으로 증언하면서 딸한테도 미안한 게 많았는데 이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라고 밝혔다.
● 이사비용 등 피해자에 실질적 지원도
A 씨는 올 4월 위증교사 혐의로도 재판에 넘겨져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A 씨의 해코지가 두려웠던 김 씨와 딸은 검찰에서 이사 비용 지원을 받아 거주지를 옮긴 상황이다. 실제로 A 씨가 김 씨에게 협박한 전력이 있고 집 앞까지 찾아오기도 하면서 A 씨에 대한 김 씨의 두려움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김 검사는 “검찰에서 피해자 지원을 연계해 이사비용 지원이 가능했고, 피해자들이 겪고 있는 실질적인 불안함을 해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었다”며 “위증도 위증교사도 실체적 진실 발견을 저해하는 행동이다. 사법 질서를 방해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처벌도 정당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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