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의대 수시모집 추가합격자 등록이 27일 마무리되고 31일부터 정시모집 원서접수가 시작됨에 따라 의료계 내부에서도 “이젠 2025학년도보단 2026학년도 정원 논의를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의료계 강경파들이 요구 중인 수시 미충원 인원의 정시 이월 중단이나, 정시 모집인원 축소가 실현 가능성이 낮은 만큼 2026학년도 신입생을 최대한 줄여 내년 이후 의대 교육과 실습의 파행을 막는 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 국민 10명 중 6명 “2026학년도 증원폭 줄여야”
동아일보와 비영리 공공조사 네트워크 ‘공공의창’이 이달 21, 22일 조원씨앤아이에 의뢰해 18세 이상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 응답자 10명 중 6명(61.3%)은 ‘교육 여건 등을 고려해 2026학년도 의대 증원폭을 올해보다 줄여야 한다’고 답했다.
국민이 가장 바라는 2026학년도 의대 정원은 ‘500명 이내 증원(21.4%)’이었다. ‘500~1000명 증원(12.8%)’까지 더하면 34.2%가 ‘증원을 하되, 올해보다 증원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답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2000명 증원(16.8%)’ 또는 내년도 증원분인 ‘모집인원 1509명 확대(16.2%)’를 2026학년도에도 이어가야 한다는 응답은 33%였다. 의료계가 주장하는 ‘예년 정원(3058명) 미만 선발(15.1%)’과 ‘교육 정상화를 위한 모집 정지(11.9%)’를 선호한 응답자는 27%였다.
의료계 내부에서는 올해 1500명가량 증원될 경우 2026학년도엔 증원분 이상을 감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신입생을 아예 뽑지 않거나 최대 1500명가량만 선발한 뒤 2024, 2025학번 최대 7500명을 수년에 걸쳐 분산 교육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상백 연세대 원주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24일 국회 토론회에서 “내년도 정원 조정이 불가능하다면 이론적으론 2026학년도는 0명을 뽑아야 하지만 쉽지 않다. (의대 1학년생이 수련을 마치는) 향후 10년간 이들을 분산시킬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은진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도 “내년도 증원분만큼 2027학년도까지 감원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 부분을 학생과 학부모가 감수할 수 있도록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번 설문에서 응답자의 38.5%는 ‘2025학년도 증원 규모를 축소해야 한다’고 답했다. 올해 증원을 취소해야 한다는 답변도 14.4%였다. 반면 ‘올해 증원은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답변은 31.3%였다. 김대진 조원씨앤아이 대표는 “국민 상당수는 의대 증원은 지지하지만, 정부의 의대 증원 방식과 규모는 잘못됐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여파로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진 것 같다”고 말했다.
● 국민 4명 중 1명 “의료공백 피해 직접 겪어”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의 23.5%는 ‘의료공백으로 인한 피해나 불편을 겪었다’고 답했다. 51.1%는 ‘가족, 친구 등 지인에게 사례를 들었다’고 답했다. 국민 4명 중 3명이 의료공백으로 인한 직간접적인 피해를 접한 것이다. 피해 사례 중에는 응급실 수용 지연이 27.5%로 가장 많았고, 진료 지연(24.6%), 수술 지연(20.3%), 신규환자 접수 불가(12.9%) 등이 뒤를 이었다.
대구에 사는 정모 씨(41)는 지난달 폐암 진단을 받은 70대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암 진행 속도를 고려하면 수술이 시급했지만 지역 대학병원에선 “의료진이 부족해 당장 수술하기 어렵다”고 했다. 정 씨는 “최소 6개월은 걸린다고 해서 서울 대형병원을 수소문해 3개월 만에 간신히 수술받을 수 있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탄핵 정국 속에서 의료공백이 내년에도 상당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면서 응답자의 50.7%는 ‘적절한 진료를 못 받을까 봐 매우 우려된다’고 답했다. ‘조금 우려된다’는 답변은 22.9%로 국민 10명 중 8명 이상이 의료공백 피해가 자신에게 닥칠까봐 걱정하는 상황이었다. 무엇이 가장 우려되느냐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은 33.3%는 처치가 시급한 상황에서 응급실 수용이 지연될까봐 걱정이라고 답했다.
● 의료공백 책임, 정부 37.4%-의료계 31.6%
‘장기간 이어진 의료공백의 책임이 누구에게 더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37.4%는 ‘정부’라고 답했고 31.6%는 ‘의료계’라고 했다. ‘양쪽 모두’라는 답변은 29.2%였다. 다만 의료공백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응답자들은 44.6%가 ‘정부 책임이 더 크다’고 답한 반면, 비경험 응답자들은 58.1%가 ‘의료계 책임이 더 크다’고 답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환자들의 불안은 올해 내내 지속되고 있는데 정부는 버티기로 일관하고 의료계는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주장만 한다”며 “정부와 의료계 둘 다 책임이 있는 만큼 지금이라도 대화와 타협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 절반 이상은 의대 증원 및 의료개혁 추진으로 의료 이용과 그에 따른 비용 부담이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의료 이용 빈도가 증가할 것’이란 응답은 50.8%로 ‘감소할 것(6.7%)’이라는 응답보다 7배 이상 많았다. 또 응답자의 55.9%는 ‘의료비 부담이 늘 것’이라고 답했고, ‘감소할 것’이라는 응답은 8.8%에 그쳤다.
의료공백의 해법을 위해 국민, 의료계, 정부가 함께 논의하는 의료개혁 공론화위를 추진하자는 데는 응답자의 84.8%가 ‘공감한다’고 답했다. 의료공백 문제 해결을 위해 누구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게 반영돼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국민’이 50.6%로 가장 많았고, ‘정부’ 21.2%, ‘의사’ 14.8%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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