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한 그릇, 사회를 잇는 희망의 한 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3일 03시 00분


[새해를 여는 사람들] 〈2〉 전길배 전주평화사회복지관 관장
복지관 1층에 무인 라면카페 마련… 은둔 고립 가구 발굴 기회로 활용
6곳으로 확대, 전국서 벤치마킹도… “힘들 때 생각나는 공간 만들 것”

전길배 전북 전주시 평화사회복지관 관장이 복지관에 설치된 무인 라면 카페에서 ‘함께라면’을 운영하게 된 배경과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 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전길배 전북 전주시 평화사회복지관 관장이 복지관에 설치된 무인 라면 카페에서 ‘함께라면’을 운영하게 된 배경과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 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전북 전주시에는 특별한 라면이 있다. 몇 개를 먹든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먹을 수 있는 자격 제한도 없다. 배가 고픈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든 먹을 수 있다. 라면을 먹는 장소도 특별하다. 일반적으로 라면을 파는 음식점이 아니라 사회복지관에 가면 먹을 수 있다.

전주시가 지난해 전면 도입한 전주형 복지 시책이자 기부 브랜드인 ‘전주 함께라면’이 이 특별한 라면의 이름이다. 자발적·장기 은둔형 고립 위기 가구를 발굴하기 위해 전주시와 6개 사회복지관이 협력해 운영하고 있다.

‘함께라면’은 2023년 시작됐다. 고립 위기 가구를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민하던 전길배 평화사회복지관 관장(43)과 직원들은 2023년 초 중고 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26세 청년이 ‘유통기한 지난 냉동식품 나눠 주실 수 있나요?’라고 올린 글에 주목했다.

전 관장과 직원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이 청년의 SOS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이 청년처럼 1인 가구가 늘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은둔형 고립 위기 가구 구성원이 스스로 밖으로 나오게 할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찾은 것이 라면이었다.

“프로젝트 진행에서 중요한 게 지속성입니다. 도시락을 배달해 주거나 근사한 밥상을 차려 줄 수도 있지만 비용 등 때문에 지속성에 문제가 있고, 위기 가구를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봤습니다. 반면 라면은 먹는 사람이나 기부하는 사람도 부담이 크지 않잖아요.”

전 관장과 직원들은 2023년 6월 복지관 1층 로비에 스스로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무인 공간을 만들었다. 지인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라면을 기부받았다. 특히 라면 기부를 받을 때는 복지관 인근의 상점에서 사달라고 부탁했다. 지역사회와 상생을 위해서다.

동네 곳곳에 라면 카페 운영 전단을 붙이고 입소문을 냈다. 2023년 6월부터 2024년 3월까지 3000명이 라면을 먹었다. 삶의 어려움을 겪는 위기 가구 42가구가 정부 지원을 받았다. 라면이 위기 가구와 복지 체계를 이어줄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판단이 적중한 것이다.

전 관장은 “고독사가 느는 것은 그들을 도울 촘촘한 복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비록 라면 하나를 먹는 시간이지만 이들이 밖으로 나오면서 주변에 숨어 있던 고립 가구를 돕는 효과는 컸다”고 했다.

위기 가구 발굴에 효과가 있음이 입증되면서 전주시가 고향사랑기부금 1호 사업으로 전주함께라면을 선택했다. 평화사회복지관 한 곳에만 있던 라면 카페를 지난해 6월 전주 시내 6개 복지관으로 확대했다.

그 결과 위기 가구 79가구를 추가로 발굴하는 성과를 냈다. 벤치마킹을 위해 전국의 자치단체에서 찾아왔고, 위기 가구를 돕겠다며 라면을 기부하는 행렬도 이어졌다.

26세 청년의 외침을 귀담아들어 새로운 위기 가구 발굴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전 관장. 이 같은 성공은 사회복지관이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업무가 행정의 복지 사각지대 발굴 시스템이 챙기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는 위기 가구를 찾아내는 것이라는 평소 신념이 있어 가능했다.

전 관장은 “복지관은 프로그램 운영도 중요하지만 위기 가구를 발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라며 “주변에서 고독사가 있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들을 찾기 위해 더 뛰지 않았는지를 반성했다. 이런 소식을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뛰다 보니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전 관장과 직원들은 요즘 ‘함께 라테’ 운영을 준비 중이다. 건강 등의 문제로 라면을 먹지 못하는 위기 가구 구성원들이 따뜻하거나 시원한 커피 등 음료를 마시며 이웃과 대화하고, 이를 통해 현재 겪고 있는 위기를 해결해 나가도록 돕기 위해서다.

전 관장은 “우리는 누구나 복지가 필요할 때가 있다. 평화사회복지관을 복지가 필요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며 “복지가 필요한 분들에게 자신 있게 추천해 줄 수 있는 ‘복지 맛집’으로 소문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만 복지가 필요했다면 최근에는 복지의 영역이 더 커지고 있다. 도움을 받고 싶은 위기 가구는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며 “이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시간에 언제든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복지 관련 예산과 이들을 돕는 사회복지사의 처우도 개선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전길배#전주평화사회복지관#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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