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리산 종주]지친 마음 품어주는 「어머니 산」

  • 입력 1998년 6월 11일 07시 41분


서울에서 전라선 기차를 타고 네시간여. 구례구역에 닿았다.

노고단밑 성삼재까지 가는 택시를 타기위해 역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사람이 주뼛주뼛 다가온다.

“지리산 종주하실거면 같이 합류하면 안될까요?” 서울에서 회사다니다 일주일전 실직했다는 K씨. 불면증에 시달리다 몸을 좀 혹사(?)시키면 잠이 올까해 휭하니 왔는데 초행이란다. 함께 간 일행들이 그를 기꺼이 맞아 성삼재로 가는 택시에 같이 몸을 실었다.

노고단산장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9시. 일찍 눈을 붙였다.

다음날 아침 상큼한 공기가 눈동자와 머릿속을 씻어주는 느낌에 잠이 깼다. 비는 그쳤지만 안개 때문에 시야가 좁다.

30분쯤 오르니 노고단(1천5백6m)정상. 날이 맑을땐 멀리 정상 천왕봉이 보이고 좌우로 만복대 왕시루봉이 펼쳐진다고한다.

앞서가던 등산객이 물을 권한다. 중소기업 직원인데 사장이 보너스는 커녕 월급까지 절반 깎아놓고 이틀전에는 전 직원에게 일괄사표를 쓰라고 해 아예 모두가 출근을 거부하고 있단다. 혼자 산행을 왔는데 혹시 동료들 비상연락이 올까해서 핸드폰을 켜놓고 걷는다고 했다.

3.2㎞를 오르락내리락 돼지평전을 지나 임걸령(1천3백20m), 반야봉(1천7백28m)을 향해 가파른 오르막 능선길을 숨가쁘게 오르니 작은 고개가 나온다.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피아골을 내려다 보는것 같다해 이름붙여진 노루목삼거리다.

완만한 능선을 따라 전남북과 경남이 만나는 삼도봉(일명 낫날이봉)을 지나 뱀사골 방향으로 접어드니 갑자기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진다. 간밤 비에 떨어진 진달래꽃잎 사이사이로 수줍은듯 피어있는 노란 야생화들이 반갑다.

거친 숨을 헐떡이고 지친 다리를 쉬어가며 30여분 걸으니 갑자기 나타나는 밋밋한 초원, 화개재다. 구상나무숲을 헤치며 40분가량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토끼봉(1천5백37m)을 만난다. 점심을 먹기로 한 연하천 산장(1천4백80m)에 도착한게 오후 2시. 이미 많은 등산객들로 분주하다. 옆자리에 앉은 30대 여자 두 사람은 서울에 있는 공고 선생님들. 취직하나 믿고 입학한 학생들이 탈선, 가출로 방황해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란다.

점심먹고 오른편으로 2㎞ 걸어 나오는 삼각고지(1천4백70m)를 지나 능선길을 한참 내려가니 10여m 바위 2개가 우뚝 솟아있다. 다정한 모습이 형제같다해 불리는 형제봉.

이곳에서 벽소령산장(1천3백50m)까지 가는 1시간 길은 그야말로 고난행군. 금방 산길을 돌아서면 산장이 잡힐 것 같은데 다리는 아파오고 발바닥은 쑤셔 주변 경치고 뭐고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만나는 통나무 산장지붕이 어찌나 반가운지.

벽소령산장은 지리산 종주코스의 정 중앙지점으로 종주하려는 사람들이 하루 묵어가는 곳이다. 다음날 아침 눈뜨니 온 몸이 욱신욱신 천근만근이다. 종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불안한 마음으로 밖을 나서니 안개가 말끔히 걷혔다. 들리는 것은 온통 새소리뿐.

일곱 선녀가 노는 형상같다는 칠선봉(1천5백76m)을 지나 오전 9시 세석평전(1천4백∼1천7백14m)에 닿았다. 비좁은 산길을 걷다 만나는 널따란 초원이 신기하기만 하다. 철쭉이 망울을 터뜨려 연분홍양탄자를 밟고 서있는 것 같다. 여기서 촛대봉을 지나 장터목까지 가는 2시간길은 종주코스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멀리 남해 산능선들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겹겹이 부드럽게 번지고 구름이 다가왔다 사라졌다하는 경치가 탄성을 자아낸다.

12시반, 장터목(1천6백50m)산장. 40여분 걸어 드디어 1천9백15m 천왕봉 정상. 동서남북 거칠것 없는 전망에 이틀간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흐르고 해냈다는 자신감에 가슴이 벅차다.

만세와 야호소리, 카메라 샤터소리로 시끌벅적하다.

다시 장터목 산장으로 돌아와 늦은 점심을 먹고 오후 3시경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중산리 거림 칠선계곡 백무동등 4개 코스가 있으나 완만한 백무동코스가 초행자에겐 안성맞춤이다.

왼쪽무릎이 땅을 디딜 때마다 아파오고 오른쪽 발가락엔 물집이 생겨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래도 하산길은 한결 가볍다. 3시간여 내려 만난 샘골. 얼음같은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피로가 좍 풀린다.

산밑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 대장정을 마쳤다는 대견함에 술술 넘어간다. 식당에서 만난 한 50대 샐러리맨은 “6·25 피난때보다 더 걸었다”며 자신감으로 충만하다. 한많은 우리삶이 고스란히 묻혀있는 지리산. 이 시대 그곳에 가면 세파의 힘겨움을 이기려 몸부림치는 나와 우리의 초상이 있다. 힘들고 지친 자들이여, 지리산 종주를 해보자.그러면 훨씬 힘이 생긴다.

〈지리산〓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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