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戰 관전기]김용정/기적은 없었다

  • 입력 1998년 6월 21일 19시 42분


게임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6만여 관중이 빼꼭이 들어찬 마르세유 벨로드롬 경기장은 일순 환호와 열광, 탄식과 안타까움으로 출렁였다.

오렌지색 유니폼의 3만여 네덜란드 응원단은 일제히 일어서 박수와 환호로 5대0의 대승을 자축했다. 그러나 한국응원단 ‘붉은 악마’들과 유럽 각지 그리고 멀리 미국에서까지 날아온 우리교민들의 함성은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마디로 기적은 없었다. 54년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은 이래 모두 다섯번째 본선에 진출했으나 그토록 염원하던 16강의 꿈은 이번에도 또다시 무산되었다. 벨기에와의 마지막 대전을 남겨두고 있지만 이미 희망은 사라졌다. 월드컵 출전사상 첫 1승의 기대도 객관적 전력평가로는 절망에 가깝다.

▼초반부터 자신감 잃어▼

애당초 승리를 기대하지 않았지만 네덜란드전에서 0대5의 완패는 충격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세계축구의 벽이 얼마나 높은지를 실감하게 된 것도 또 다른 좌절과 허탈감을 안겨준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선수들이 경기 내내 보여준 무기력함이었다.

멕시코와의 일전에서 아깝게 빼앗긴 월드컵 1승의 후유증만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와의 대전은 어차피 총력전으로 맞선 한판승부여야 했다. 우리 선수들 스스로가 다짐했듯 ‘불가능은 없다’는 패기와 자신감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게임은 전반전 시작후 얼마되지 않아 판가름나고 있었다.

세계적 스트라이커 베르캄프, 오베르마르스 등의 막강 공격진에다 전원공격 전원수비의 ‘토털사커’를 구사하는 네덜란드의 파상공세에 밀려 우리선수들은 처음부터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한국의 공격수들은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고 과감한 돌파작전에 나서지 못했으며 수비수 또한 적극적인 방어전을 펴지 않아 중앙과 측면이 순식간에 무너지곤 했다. 개인적인 기량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난데다 조직력에 밀리고 한국축구 특유의 투지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최선다한 일본과 대조▼

94년 미국월드컵때 전(前)대회 우승팀 독일을 상대로 전반 3골을 허용하고도 후반에 2골을 따라붙은 투혼은 어디로 갔는가.

현지 언론들은 일본축구를 극찬한 반면 차기 월드컵 공동개최국인 한국에 대해서는 극히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한다.

월드컵에 처녀출전한 일본은 비록 아르헨티나와 크로아티아에 패했지만 놀라운 기량과 함께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축구는 물론 축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원초적 승부욕과 집단적 우월감을 자극하는 정치 그리고 사회적 민족적 이벤트이다. 골문을 가르는 공은 그래서 총이 되기도 하고 선수들이 누비는 그라운드는 민족감정을 뜨겁게 달구는 용광로가 되기도 한다.

▼원점에서 다시 시작을▼

66년 영국이 제8회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기자 영국인들은 이렇게 외쳤다. ‘투 월드워(Two Worldwar) 원 월드컵(One Worldcup).’ 1,2차 세계대전에서 이겼고 또 월드컵에서도 승리했다는 뜻의 ‘국가적 자존심’을 드러낸 것이다.

16강진출이 좌절됐다고 지나친 낙담은 금물이다. 우리는 이제 한국축구를 원점에서 되돌아보고 그 기반부터 다시 다져 나가야 한다.

어쩌면 축구만이 아닌 모든 것이 그럴는지도 모른다.

김용정<논설위원〉yjeong4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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