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치라인을 따라 필사적으로 공을 몰고 달리는 서정원의 어깨를 생각한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매일 아침 직장으로 향하는 사내들의 어깨처럼.
왜 사내들은 저렇게 달려야만 할까. 왜 뛰고 또 뛰어야만 할까. 신새벽 막다른 골목길. 담벼락에 등을 활처럼 구부리고 토악질하고 있는 어느 이름 모를 사내. 이젠 힘 떨어지고 지쳐 재활용도 안되는 폐품, 평생 투레질 한 번없이 일만 하다가 이젠 다리 힘이 떨어져 헉헉거리는 늙은 노새같은 사내.
왜 사내들은 마시고 또 마시는가. 그리고 왜 또 게워 내는가. 강호의 무림세계는 하루도 편한 날이 없다. 저마다 홀로 황야의 늑대처럼 제가슴의 상처를 핥으며 울부짖는다.
하석주를 생각한다. 하석주는 지금 얼마나 마시고 싶을까. 얼마나 외로울까. 「모든 게 내탓」이라며 얼마나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있을까. 몇가지 의문을 풀어보자.
△도대체 하석주를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이 넣은 선제골로
한국이 유리한 상황이었는 데 왜 그렇게까지 무리했는지. 월드컵 본선 무대 44년만에 한국이 넣은 첫 선제골이라는 기쁨에 너무 흥분했던 건 아닌가?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앞뒤 상황을 살펴보면 하석 주의 백태클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선수들은 항상 골 앞으로 몰려다닌다. 다시 말하면 상대가 골인했다고 잠깐 방심하는 5분 사이에 곧바로 역전골이나 동점골이 많이 터진다는 뜻이다.
많은 경기경험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는 하석주는 멕시코 공격진이 한국팀 의 전열이 흐트러진 틈을 뚫고 질풍같이들 어오자 일단 중간에서 끊어줘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석주는 자기의 선제골에 흥 분해서 무모한 태클을 할 정도로 어설픈 선수가 결코 아니다.
문제는 차범근감독이 경기후에 「하석주의 태클 정도면 경고는 몰라도 퇴장은 너무했다」고 말했듯이 우리가 생각하는 백태클 금지의 적용 눈높이와 심판의 눈높이가 달랐던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순진했다는 뜻도 된다. 태클도 기술의 하나다. 이런면에서 한국선수들의 태클은 촌스럽기 짝이 없다. 보기엔
무시무시하고 거창하지만 사실 실속이 없다. 유럽이나 남미선수들의 기묘한 반칙들을 TV화면의 슬로비디오를 통해 본적이 있다면 이내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지난호 「NEWS+」에서 필자는 「한국팀 이 바로 이 문제로 인해
10명이 싸우지 않을까 제일 걱정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좋다.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10명이 싸운다 하더라도 추가득점은 몰라도 선취골 1점 정도는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 사실 축구선진국에선 1점을 지키는 것뿐 아니라 도리어 추가득점을 한 경우도 많다. 문제는 선수들의 전술 운용능력이다.
한국팀은 이런 경우에 대비해 한번도 훈련해 본 적이 없었음이
드러났다. 11명이 싸우는 데에만 익숙하다. 더구나 한국축구 약점의 하나가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선수들 자신이 어쩔 줄 몰라한 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릴때부터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해온 주입식교육의 폐해다.
상상력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감독의 지시를 받고 나온 후반에 더욱 우왕좌왕 했다는 면에서 절망감을 느낀다. 한마디로 선수들의 심리적 마지노선이 후반 첫골을 내주자 「이젠
틀렸구나」하고 와르르 무너져내린 것 같다. 개인기가 모자라는
한국팀은 조직력이 한번 무너지면 걷잡을 수없이 무너지 게 돼 있다』
△후반에는 체력이 완전히 바닥난 것 같던데 ….
『그것도 전술과 관련이 있다. 한국이 아무리 체력이 강하다해도 어떻게 10명이 11명을 이 길 수 있겠는가. 더구나 한국은 체력소모가 많은 맨투맨을 기본전술로 하는 팀이다. 지역방어와 맨투맨을 적절히 섞어쓰며 힘을 아끼다가 서정원 등 빠른 발을 이용해 기습공격을 노렸으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선수들의 전술운용능력을 전제로 한 가정일 뿐이다』
△도대체 축구선수가 90분간 얼마나 뛰기에 그렇게 힘들어하는가.
『축구선수는 보통 1경기에 평균 12km를 뛴다. 물론 전국가대표
이영무는 20km까지 뛰 었다. 공격수가 평균 15km쯤 뛰고 수비수들 은 9~10km쯤 뛴다. 미드필더들은 그 중간이다. 독일이나 브라질 등 세계 최고의 선수들 은 한 게임 평균 15km쯤 뛴다. 몸무게도 보통 1~1.5㎏이 빠진다. 최고 3㎏이 빠지는 사람도 있다. 또한 평균 10초에 한번씩 급격한 방향전환을 해야 하며 1분에 한두번은 100m 를 전력 질주해야 한다. 칼로리소비량도 엄청나다. 보통 한 경기에 1000~1500k㎈가 소모된다』
△이제 와서 다 소용없는 얘기지만 11명이 정상적으로 싸웠다면
어땠을까.
『사실 객관적 전력으로 보면 우리가 멕시코 에 한골차 정도로
차이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하석주의 선제골이 이것을 충분히 상쇄해줬기 때문에 그대로만 갔더라면 월드컵 본선 44년만에 첫승을 올릴 뻔도 했다』
△차범근감독의 작전에는 문제가 없었는가.
『벌써부터 「차감독 물러가라」는 전화가 언론사에 빗발치고 있다.
이것은 정말 안될 말이다. 한게임 졌다고 왜들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
아직 두 게임이나 남았다. 기분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어차피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지게 돼 있다. 일을 한번 맡겼으면 믿고 힘을 보태줘야 한다.
이를 전제로 한가지 의문점을 얘기한다면 「왜 1년여 기간을 연습해온 3-5-2를 버리고 생전 해보 지도 않은 3-6-1을 갑자기 채택했는지」 궁금하다. 그러지 않아도 전술운용능력이 떨어 지는 한국선수들에게 아무래도 무리였다. 아무리 좋은 전술도 현실에 바탕을 둬야 한다.
아무래도 멕시코를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지 나쳐 「제꾀에 제가
넘어가는」 우를 범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왜 최용수 대신 김도훈을 투입했느냐, 왜 서정원을 전반부터 투입하지 않았느냐는 등의 선수 기용문제는 전적으로 감독의 권한이다. 그날 선수들의 컨디션은 감독이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결코 시비를 걸 일이 아니다』
△앞으로 멕시코보다 전력이 강한 네덜란드 벨기에 두 팀이 남아 있다. 최소한 1승1무는 해야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정말 16강 얘기만 나오면 화가 난다. 도대 체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다. 축구가 무슨 전쟁인가. 목표를 정하는 건 좋지만 자기 실력은 생각지 않고 무조건 16강에 가야 한다는 건 무리다.
멕시코만 해도 축구인구가 자그 만치 140만명이고 프랑스는
200만명이다. 한국은 1만3730명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16강은
거품이다. IMF사태도 결국은 모두가 「우리는 경제 선진국」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온 것 아닌가.
물론 공은 둥글고 예외성이 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이기고 16강에 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요행수」에 불과하다. 요행수를 바라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쨌든 분명한 것은 우리 한국팀이 네덜란드와 벨기에전에서는 멕시코전보다 더 잘 싸울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멕시코에 짐으로써 「16강 진출」이라는 중압감에 서
해방됐기 때문이다. 우리 선수들의 몸놀림이 한층 가벼워질 것이다.
「16강 신드롬」 은 한마디로 악령이다. 욕망을 버리면 모든 게 잘 보인다. 국민도 처음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TV를 보게 될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번 멕시코전에서 배울 게 있다면.
『정말 많다. 하석주의 퇴장은 앞으로 한국축구 발전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앞으로 국내 프로축구의 거친 태클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젠 기술만이 통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심판들도 이제는 소신있게 휘슬을 불게 될 것이고 어린 축구
꿈나무들도 더욱 더 기술축구에 매달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축구가 점점 재미있어질 것 이고 그만큼 관중이 모여들 것이다. 한마디로 거품이 빠진다는 얘기다』
「하석주」는 이제 한국축구의 화두다. 한국축구는 잡초처럼 강하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선 아직 촌스럽다. 여기저기 다듬어야 할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그렇게 하려면 이곳저곳 쪼개 분석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이런 마당에 누가 하석주에게 돌을 던질 수 있나. 자격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
김화성〈체육부기자〉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