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를 따라 북상하는 동안 문경까지는 막아서는 게 없다. 그리고 새재만 넘으면 충주땅이고 여기서 부터는 한강 줄기만 따라가도 한양땅에 이른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뒤덮인 이 땅. 그런데도 부산∼서울 길에 넘어야 할 재는 단 하나 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운 산맥체계로는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맥지도를 놓고 보면 그 길에는 소백 차령산맥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그린 한반도 지형도를 보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한강유역과 낙동강유역을 나누는 분수령이다. 그 대간의 산줄기를 가로 질러 두 지역의 중심인 한양과 부산을 잇는 최단거리의 선을 그어 보자. 새재는 그 선과 대간의 줄기가 만나는 곳이며 그 선이 한양가는 길이다.
우리 국토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처음 부른 이는 조선시대 학자인 여암 신경준이다. 그는 ‘산경표(山經表)’라는 지리서(1769년 발간)에서 한반도의 산줄기를 ‘1대간 1정간(正幹) 13정맥(正脈)’으로 나눴다. 대간과 정간은 한반도의 물줄기를 동서로 흐르게 하는 분수령, 정맥은 그 강을 울타리처럼 둘러 싼 산줄기다.
이 백두대간으로 일본인 고토분지로(小藤文次郞)의 ‘산맥체계론’에 맞섰던 이는 육당 최남선이다. 육당은 1905년 조선통감부가 고토의 산맥론을 교과서에 싣고 고토가 ‘토끼형국론’(한반도를 토끼모습에 비유)을 펴자 ‘맹호형국론’(한반도를 옌하이저우를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에 비유)으로 맞서며 조선광문회(1910년 설립)의 고전간행사업을 통해 ‘산경표’를 발간, 백두대간을 알리기 시작했다.
<조성하기자>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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