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그의 생활 뒷면에는 내색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동아대에 엄연히 유도부가 있는데도 지도자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김재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계획대로였다면 동아대 유도부를 맡아 제자들을 키우고 있겠지만 선수 시절부터 잦은 충돌을 빚었던 사람들이 하형주한테 지도자 자리를 맡길 수 없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어쩔 수 없이 매트가 아닌 강단에서 교양체육을 맡게 된 하형주는 1학기에 13시간이나 되는 수업시간을 채우는 게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놓는다.
“배운 게 유도밖에 없는 사람이 교양 체육을 맡았으니 가르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리 용을 써도 6시간밖에 채울 수 없었습니다. 수업시간을 채우지 못한 데 대한 경위서를 쓰는 일이 제일 바빴죠. 제 연구실에 책상과 컴퓨터, 팩스가 그럴 듯하게 놓여 있는데도 사용할 수가 없었어요. 밥값을 제대로 못한데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죠.”
도피하다시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년간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 후 서울대 대학원 박사 과정에 응시했다가 두 번이나 고배를 마신 다음 성균관대에서 어렵게 박사 과정을 마쳤다. 하형주는 동아대에서 스포츠심리학을 맡게 된 것도 실력 반, 투쟁 반이라고 설명한다. 그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에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고.
우여곡절 끝에 연구실을 확보한 하형주는 요즘 다른 교수들처럼 외국에 교환교수로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자리를 비운 동안 누군가의 ‘장난’으로 연구실을 빼앗길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있다.
선수 시절부터 대학 교수가 꿈이라고 주문처럼 말하던 전병관(31)은 평택 경문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후 교수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그는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한국 역도 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목에 건 후 전성기를 보내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실격패하고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동안 운동을 쉬다가 다시 바벨을 잡았지만 결국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해 7월 쓸쓸히 은퇴했다.
이영미/스포츠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