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명스런 대답이 바로 튀어 나왔다. 전 월드컵축구대표팀 차범근감독(47)의 부인 오은미씨의 목소리였다.
"차 한잔 얻어 먹을 수 있을까요?"
"싫어요. 저희(차범근감독)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짧은 대답. 난감했다.
'비빌언덕'이 있어야지 말을 이어가지…오씨는 금방이라도 수화기를 내려 놓을 듯하다. 끊어질 듯한 대화는 겨우 겨우 이어졌다.
"기자는 만나고 싶지 않아요" 언론에 대해 섭섭해도 한참 섭섭한 모양이다. 허긴 '필화(?)'를 입고 중국으로 독일로 떠났던 차 감독 아니었던가.
"언론에 대해 많이 섭섭하셨죠?" 곧바로 오씨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섭섭한 정도가 아니죠. 언론은 우리를 잊을 수 있겠지만 우리는 언론을 잊지 못할 겁니다."
"잠깐이라도…"
"싫어요"
오씨는 그밖에 몇마디하고는 그렇게 수화기를 놓았다.
차범근. 치밀한 성격과 탁월한 용병술로 월드컵 4회연속 본선진출에 성공해 '한국스포츠 최고의 지도자'로 떠올랐던 '명장'. 그러나 프랑스월드컵 16강행 실패뒤 '경기중 낙마'한 불운했던 한국 지도자'.
그는 월드컵감독시절 '천당'과 '지옥'을 오간 인물이었다.
그 뒤 그의 행로는 어떠했는가. 중국 선천 핑안 감독 도중 한 언론과의 인터뷰서 승부조작설을 제기, 축구협회로부터 5년간 자격정지라는 '중형'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선전 핑안팀 감독을 사임한 뒤에는 독일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독일서 아내 오은미씨의 병 간호에 전념하며 외부와의 접촉을 피한 채 '칩거'했다.
'독일칩거' 약 9월이 지난 올 8월 마지막날. 그는 가족과 함께 다시 고국을 찾았다. 그렇지만 그는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개인적인 말이든 축구에 관한 말이든.
다만 오씨는 "차감독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혀 차범근 어린이축구교실에 전념할 것임을 시사했다.
'한국축구가 버벅대는' 요즘 그를 그리워하는 축구팬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보다 적극적인 사람들은 차감독 컴백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여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축구가 총체적 위기국면을 맞은 요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한국축구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또 '백수'라는 그의 생활은?
그의 측근을 통해 들은 차감독의 한국축구에 대한 생각은 대략 이렇다.
'누가봐도 한국축구는 위기다. 그것은 감독이나 축구협회의 문제가 아니다. 총체적인 한국축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이런 상태에선 외국인 감독을 영입하든 한국인 감독이 있든 전략의 극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한국축구가 감독을 바꾼다고 일본축구처럼 대약진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이건 지난 8월 이야기다.차감독이 한국 축구의 문제점에 대해 잘 짚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차감독은 지금 무엇을 하며 지낼까. 마냥 놀까? 아니면 또다른 무엇을 준비할까.
그와 교류하고 있는 축구인 C씨는 "아침에 기도하고...그냥 조용히 살고 있다. 차범근어린이축구교실에 관심이 많다. 국가대표감독직은 물론이고 프로팀 감독직도 관심이 없는 듯 했다.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천직으로 알고 있는 듯 하다. 가끔 서울 동부이촌동의 차범근축구교실에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얼마전 한 축구계인사로부터 들은 이야기. '축구 원로들이 앞장서서 차감독을 2002 월드컵 홍보대사로 추천하려 하고 있다'는 것. 내친 김에 오씨와의 전화통화 때 슬쩍 물어 보았다.
"축구인들이 베켄바워나 플라티니처럼 월드컵 홍보대사로 추천하려 한다고 들었는데 홍보대사 제의가 오면 어떻게…"
"관심없어요. 지금은 이야기하기 싫습니다" 오씨는 간결하게 대답했다.
선진축구를 익힌 그. 양지에서 음지로 몸을 낮춘 그가 다시 양지로 나와 한국축구에 '훈수'할 날은 언제일까.
연제호/동아닷컴기자 so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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