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단의 입장에서 평소생활도 구단에 비협조적이었던 강병규가 투쟁 일변도의 모습으로 나오자 구단은 기다렸다는 듯이 강병규를 팀에서 내몰았다. 그 때는 다행히도 좋은 성적을 올렸었고, 선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신생팀 SK가 그를 받아주었다.
그러나 올시즌 부진을 면치 못하자 SK는 시즌 종료 후 강병규를 자유계약선수로 풀어버렸다. 강병규는 선수생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나 오라는 팀이 없다. 마치 구단끼리 담합을 하고 강병규를 내몬 형상이다.
메이저리그의 경우에도 강병규와 비슷한 입장에 처했던 선수가 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활약하던 외야수 커트 플러드. 그는 당시 현대판 노예제도라고 불리던 트레이드 제도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던 FA제도의 개척자이다.
플러드는 올스타 3번과 골든글러브 7번을 수상하는 등 뛰어난 외야수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69년 시즌이 끝나고 구단이 그를 필라델피아로 트레이드 해버렸다. 이에 반발한 플러드는 선수생활을 유보하고 법정 투쟁에 나섰다. 플러드의 요구는 법정에서 조차도 기각되고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희생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 이 사건은 76년도 FA가 탄생되는데 도화선이 되었다. 플러드는 FA의 수혜를 받지 못했지만 FA의 개척자로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강병규는 선수들의 권익을 위해 출발한 선수협의 결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많은 동료 선수들 중 유독 그만 미운털이 박혀 현재 선수생활의 위기에 봉착했다. 방출 통보를 받고 굵은 눈물을 흘렸던 그는 지금 순간에도 올림픽 공원을 달리고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계에는 몇몇 개척자들이 있었다. 그 당시에는 개인적인 행동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지만 현재는 선수협을 통해 단체 행동에 나서려 하고 있다.
강병규 문제를 선수협 차원에서 해결해 주지 못한다면 선수협의 결성 의미는 반감되는 것이다.
내년시즌 마운드에서 강병규가 힘차게 볼을 뿌리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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