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3시28분. 열차에서 내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역 앞 기사식당. 구수한 된장에 시래기를 넣고 맵싸한 고추로 맛을 낸 해장국. 한 그릇 뚝딱 비우고 식당을 나선 시각은 오전 4시15분. 택시로 유일사쪽 등산로 입구를 향했다(1만5000원).
오전 4시 50분. 첫 발을 내딛는다. 정상(장군봉·해발 1566.7m)까지는 3.8㎞. 7일 폭설 때 30㎝나 내린 눈은 숲에서 무릎까지 쑥쑥 빠질 정도다. 등산로는 조금 나은 편. 앞선 등산객의 발자국만 밟고 가도 다져진 덕을 볼 만할텐데 밤길이라 그나마 쉽지 않다. 고마운 것은 보름달(10일 새벽). 휘영청 밝은 달과 눈에 반사된 달빛 덕분에 랜턴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새벽 산행길에는 오감이 활짝 열린 듯 모든 것이 그렇게 분명할 수가 없다. 고고한 달빛이 흰 눈에 반사돼 눈 밭에는 나무 그림자가 선명하다. 초롱초롱한 별마저 그 색깔과 밝기가 구별될 정도. 바람이 숲을 헤치는 소리, 눈 무게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가 찢기는 소리, ‘뽀드득 뽀드득’ 발바닥 아래서 들려오는 ‘발자국 랩소디’, 새벽닭 홰치는 소리…. 모든 게 정겹기만 하다.
미끄러지고 붙잡아주고, 보름달 한번 올려다보고 곤한 새벽잠에 개짖는 소리마저 멈춘 아랫마을의 따뜻한 불빛에 눈길 한번 주고. 가다 서며 오르기를 두 시간. 장군봉 바로 아래 주목군락 능선에 서니 동편 산등성이가 산불에 휩싸인 듯 벌겋다. 동해를 박차고 떠오른 붉은 해의 첫 햇살 여파다. 온통 하얀 백설의 세상에 용광로의 쇳물을 부은 듯하다. 이어진 해돋이. 짙은 해무를 뚫고 치솟은 해가 대지를 밝힌다. 세상이 개벽을 한다. 모든 존재가 제 색깔을 찾는다. 흰 것은 더 희게, 검은 것은 더 검게.
세상이 밝자 태백의 웅자는 더욱 도도하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는 귀한 주목이 널브러진 능선 풍경도 이미 지상의 것이 아니다. 살을 에는 추위는 장갑 모자는 물론 등산복에까지 상고대가 필 정도. 그러나 선경에 취해 떠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천년 풍파 아로새겨진 ‘할아버지 주목’에 핀 상고대는 처연하지만 굳건한 가지에 청청한 푸른 잎을 뚝심있게 지닌 청년 주목의 눈꽃은 보기에도 당당하다.
칼바람 몰아 때리는 서슬퍼런 태백산 동장군의 위력에 손도 발도 꽁꽁 언다. 이제 장군봉 천제단을 차례로 거쳐 하산할 시간. 당골가는 길은 훨씬 수월하다. 천제단과 망경사를 잇는 칼바람 능선만 지나면 ‘고생 끝, 행복 시작’. 바람도 잦아들고 햇빛 쏟아지는 양지받이 계곡에 들어서기 때문이다. 망경사 매점 앞 햇볕 따뜻한 돌축대에서 선 채로 먹는 컵라면(2000원). 얼어 붙은 몸이 사르르 풀린다. 2000원 가치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아이젠(눈길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신발바닥에 부착하는 도구)을 신발에 붙일 때. 눈길 내리막도 걱정 없다.
태백산 산행의 보너스 하나. 23일까지 당골광장에서 열리는 태백산 눈축제다. 눈조각 경연대회에 출품된 설상 10여개가 등산객을 반긴다. 얼음터널도 있고 설질이 국내 최고라는 눈썰매장도 여기에 있다. 당골광장 식당가에서 점심식사를 마치니 오후 12시반. 택시로 태백역으로 가(20분 소요) 낮 1시1분 발 서울행 열차로 귀로에 오른다. 차창 밖은 온통 설국. 좌석에 앉으니 눈이 저절로 감긴다. 졸다 깨며 눈덮인 시골 풍경을 좇다 보면 어느덧 청량리역에 도착(오후 5시47분)한다. 무박2일(18시간 소요)의 태백산 눈꽃등반. 18시간의 짧은 여행이지만 그 여운은 길다.
전국 대도시 출발편〓서울 대전 광주↔태백(직행), 부산 대구↔영주↔철암(영동선)↔태백(버스). 문의는 철도여행안내센터 02―392―7788
서울 출발편(무박, 당일)만 있다. 승우여행사(02―720―8311)의 ‘간이 눈꽃열차’(태백↔청량리 열차왕복+태백산 관광) 상품이 눈여겨볼 만.
summ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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