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서울올림픽 유치가 그의 첫 번째 업적. 그는 올림픽 개최지 결정을 불과 넉 달 앞둔 81년 5월 올림픽유치 민간위원장을 맡아 나고야를 제치고 개최권을 따낸 주역이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로 생화를 배달하는 등 갖가지 아이디어로 환심을 샀고 전경련 회장으로서 기업계 인맥을 최대한 활용해 ‘불가능할 것 같은 올림픽 유치’를 이뤄냈다.
82년엔 제27대 대한체육회장에 취임해 직접 올림픽 준비에 나섰다. 84년 10월까지 2년3개월간의 재임기간 중 체육계에 ‘경영마인드’를 도입해 한국체육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투자 없는 경영으론 금메달을 딸 수 없다”며 사재까지 털어 체육계에 투자했고 이 결과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때부터 한국은 스포츠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대한체육회 고문, 체육동우회장,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집행위원, 서울 아시아경기조직위원회 위원장 등 그가 거친 체육계 자리도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정몽구(양궁협회 회장) 정몽준(대한축구협회 회장) 정몽윤(전 대한야구협회 회장) 등 직계가족은 물론 계열사 사장들에게 종목별 회장에 오르게 하는 등 그는 한마디로 ‘한국체육계의 대부’였다.
2002월드컵유치도 그의 도움이 컸다. 6남 정몽준 회장이 어려울 때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수십억원의 기금을 출연했고 현대종합상사 기획실에 유치 사령탑을 설치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월드컵 유치는 한국과의 싸움이 아니라 현대와의 싸움”이라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스포츠팀을 다수 창단해 국내스포츠를 활성화한 공로도 크다. 77년 현대여자배구단, 78년 현대남자농구단을 창단한 데 이어 80년대 축구 씨름 남자배구, 90년대 여자축구 여자사이클 여자탁구 프로야구 등 한 해 500억원 가까운 돈을 체육팀에 투자했다.
이렇게 그가 스포츠에 큰 정성을 쏟은 데는 그 자신이 바로 타고난 스포츠광이었기 때문. 강원 통천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씨름을 곧잘 했던 그는 바쁜 기업활동 중에도 테니스, 야구, 탁구 등을 사원들과 함께 즐겼을 만큼 스포츠에 애착이 강했다. 특히 씨름과 여자농구는 최근까지 경기장을 찾아 관람할 정도로 애정이 대단했다.
<양종구기자>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