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에는 때 빼고 광내고 좌악 빼입은 신사복 차림으로 김대중대통령을 만났다. 같이 간 어머니 공옥희(66)씨는 연신 "내 생전에 어떻게 대통령을 뵙게 될 줄 알았냐"며 막내 아들 봉달이를 자랑스러워 했다. 김대통령은 다짜고짜 수염 이야기부터 꺼냈다. "이봉주선수의 힘은 수염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왜 말끔하게 수염을 깎고 왔느냐"는 것. 봉달이는 엉겹결에 "어른 앞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하고 가는 것이 결례가 될 것 같아서 그랬다"고 말하고 "늘 훈련할때는 기르다가 대회가 끝나면 깨끗하게 깎는다"고 대답했다.
25일 저녁 눈코뜰새 없이 바쁜 봉달이가 오랜만에 짬을 내 기자들을 만났다.그리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장소는 서울 강남의 한 음식점.
―보스턴마라톤 우승 후 TV인터뷰를 보니 참 영어 잘 하던데….
“잘 하기는 뭐…. ‘땡큐 베리 머치’ 하고 ‘유어 웰컴’ 밖에 모른다. 저번 미국에서 고지대 전지훈련 때 5주일 동안 미국선생님한테 하루 한시간씩 영어를 배운 게 도움이 됐다.”
―말도 예전보다 잘 하는 것 같다.
“나도 원래 식구들이나 친구들하고는 농담도 잘하고 재미있는 사람이다.”
―별명이 ‘봉달이’인데 맘에 드는가.
“서울시청에 있을 때 오재도 코치가 지어주었다. 이름 봉주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봉지→봉투→봉달이로 돼 버렸다. 처음엔 그다지 맘에 안 들었지만 사람들이 좋아해서 나도 요즘엔 좋아졌다.”
―돈은 많이 모았나.
“좀 모았다. 내가 직접 관리한다. 땅을 조금 산 것 외엔 특별히 투자한 곳은 없다.”
―축구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들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차기를 좋아했다. 주로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이래봬도 골도 많이 넣었다. 언제나 성실한 자세가 믿음직스러운 홍명보 선수를 아주 좋아한다. 미드필드 장악력이 뛰어난 프랑스의 지단도 아주 좋아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던데….
“최근 최인호 선생의 ‘상도’를 감명 깊게 읽었다. 음악은 바빠서 들을 시간이 없었다. 최근엔 컴퓨터에 재미를 붙여 게임을 즐긴다. 후배인 (정)남균이 한테 많이 배운다.”
―약혼자에 대해 얘기해달라.
“94년 2월5일 황영조 선수(현 체육진흥공단 감독) 집에 놀러 갔다가 황감독 소개로 알게 됐다. 만나면 언제나 편안하다. 내년에 결혼할 계획이다.”
봉달이는 요즘 여기저기 불려 다니느라 좀 피곤하지만 기분은 좋다. 시드니올림픽 때는 비참한 심정이었는데 이젠 자신감도 생겼다. 봉달이의 꿈은 일본에서 인기 최고인 40대 마라토너 다니구치(41)처럼 뛸 수 있을 때까지 뛰는 것. 그래서 ‘국민 마라토너’로 영원히 남았으면 하는 것이다. 그만큼 집념이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17일 보스턴 우승 후 8월 세계선수권이 열리는 캐나다 애드먼튼 마라톤 코스를 둘러봤을 때의 일화 하나. 서울로 오는 날 아침 봉달이는 새벽에 일어나 35㎞ 지점에서 골인 지점까지 직접 조깅을 하며 코스를 살폈다. 대회를 마친 지 이틀 만에 조깅하는 것도 놀랍지만 우승의 만족감에 빠지지 않고 다음대회를 준비하는 그 집념에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봉달이에게 물었다. 자식은 얼마나 낳을 건가.“아들 하나, 딸 하나.” 자식들이 마라톤을 한다고 한다면? “헌다는 데 시켜야쥬.” 밥을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다는데…. “선수가 편식을 하면 안되쥬. 후배들 중에는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먹으려는 사람이 있는데 이러면 안되쥬.” 요즘 후배들에게 부족한 점은? “정신력이 좀 약헌 것 같아유.”
▲이봉주 "뛸 땐 별별 생각 다해요"▲
'봉달이’는 달릴 때 무슨 생각을 하며 달릴까?. 이봉주 팬의 한결같은 질문이다.
약혼자 생각 아니면 ‘엄니’ 생각?. 아니다. 봉달이는 달릴 때 많은 생각을 하지만 오직 레이스에 관계되는 것만 생각한다. 선두권에서 순위 다툼이 치열할 때는 ‘언제 튀어 나갈까’ ‘물을 마실 때 어떻게 안쪽으로 파고들어 길가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까’ ‘상대가 지쳤을까, 아니면 아직 힘이 남았을까’ 등등.
물론 가족 생각이 날때도 있다. 경쟁자를 다 물리치고 골인 지점에 다가갈 때 가족들 얼굴이 밀물처럼 떠오른다. 이번 보스턴에선 골인 직전에 아버님 얼굴이 떠올라 눈물이 나려고 했다.
시드니올림픽 때처럼 순위가 한참 뒤졌을 땐 ‘아이고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그만 포기해 버릴까?’하는 생각도 난다. 이럴 땐 죽고 싶고 비참한 심정도 들고. 어느 땐 옛날 생각이 불쑥 떠오르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고개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달린다. 비록 꼴찌를 하더라도 중도포기는 절대 안하겠다며….
<김화성기자>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