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추칼럼]40년 동독축구를 느껴본 적 있는가

  • 입력 2002년 1월 7일 13시 53분


동·서독이 통일 된지 12년이 되었다. 그러면서 독일은 인구 8,200만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지성 귄터 그라스가 말했듯이 '징그럽게도 거대한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통일독일은 새로운 수도인 베를린을 유럽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재건이 한창이고, 그들의 경제는 다시금 서서히 기지개를 켜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동·서독 사람들 간의 위화감을 없애기 위한 사회적인 내적 노력들도 한창이다. 아직도 서독인 들은 게으른 동독인들을 오시(Ossie : 동독넘들)라고 부르고, 동독인들은 돈만 아는 서독인 들을 베시(Wessie : 서독넘들)라 부르며 서로 경멸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현 통일독일은 분명 서독인들 위주로 동독을 흡수한 통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일부 서독인들은 동독 40년을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동독은 여전히 독일 안에서 숨쉬고 있고, 빼놓을 수 없는 독일의 중요한 하나의 부분이다. 사회 각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현 분데스리가 또한 동독의 숨결이 진하게 남아있다. 그래서 분데스리가도 겨울 휴식기를 보내고 있는 이 때, 동독축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고자 한다.

독일 민주 공화국(DDR :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바로 1949년 10월 성립된 동독의 정식 명칭이다. 우리가 동독축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두 가지 커다란 사건이 아닐까 한다.

하나는 바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의 기억이다. 동독은 월드컵에 단 한 차례 출전했는데, 그 대회가 바로 서독에서 벌어졌던 10번째의 월드컵이었다. 지역예선 D조에서 5승 1패로 승점 10점을 기록하며, 승점 9점의 핀란드와 3점의 알바니아, 2점의 루마니아를 제치고 진출했던 것이다.

본선에 올라간 동독은 서독과 함께 A조에 편성되면서 세계의 눈과 귀를 집중시켰다. 상황을 중계하고 있던 동·서독 아나운서들과 조추첨장에 있던, 그리고 TV로 이 광경을 시청하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동·서 양 진영의 냉전이 긴박하던 당시였기 때문에, 두 나라의 축구대결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충격적인 소식거리 였던 것이다. 당시 서독의 헬무트 슈왼 감독은 축구 경기가 체제의 우열을 겨루는 것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지만, 입장권은 불과 이틀 만에 매진되고 말았다.

드디어 6월 22일 경기가 열리는, 정원 5만 5천 명의 함부르크의 AOL 아레나 스타디움은 이 역사적인 경기를 보려는 6만여 관중들로 가득 찼다. 당시 서독은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최고의 라이트백 파울 브라이트너, 베르티 포크츠의 철벽 수비진에 유로72 우승의 일등공신인 냉철한 미드필더 귄터 네처, 울리 회네스, 위르겐 그라보프스키의 미드필더 진을, 그리고 득점기계 게르트 뮐러와 볼프강 오베라스의 공격진을 보유한 최고의 팀이었다. 이미 서독은 2승을, 동독도 오스트레일리아에 2:0, 칠레에 1:1을 기록해 8강행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예상외로 지루하게 끌던 시합은 드디어 77분에 균형이 깨진다. 동독의 위르겐 슈파르바서가 서독 수비수들과 넘어질 듯한 자세에서 건드린 공이, 지금도 월드컵 최고 승률 기록에 빛나는 골키퍼 제프 마이어가 지키는 골문으로 들어간 것이다. 푸른 상의를 입은 동독 선수들과 국민들은 이 승리에 열광했고, 동독은 조 1위로 8강이 겨루는 2차 리그에 올랐다.

그러나, 다시 A조에 편성된 동독에겐 강팀들과의 힘겨운 대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브라질에 0:1, 네덜란드에 0:2로 패했고, 아르헨티나와 1:1로 비기며 4강행이 좌절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 대회에서 우승을 한 서독을, 분단 25년만의 대결에서 이김으로써 국제 축구계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토너먼트를 끝내고 귀국하자, 1970년부터 동독 대표팀을 이끌었던 게오르그 부슈너 감독과 선수들이 큰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부슈너 감독은 1981년까지 대표팀을 이끌며 동독 축구의 대부로 불리게 된다.

두 번째는 바로 FC 마그데부르크가, 지금은 UEFA컵에 흡수된 컵위너스컵에서 AC 밀란을 2:0으로 이기며 우승 트로피를 가져온 사건이었다. 1974년 5월에 로테르담에서 열렸던 컵위너스컵의 결승전에서 마그데부르크는 재정적인 열세 때문에 객관적으로 일류선수들이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거함 AC 밀란을 격침했던 것이다.

이 두 사건으로 70년대에 동독축구의 위상은 드높았었다. 그러나 유럽과 세계의 축구판이 돈 중심으로 흐르면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자금사정의 동독 클럽들은 침체기를 걸었고, 이젠 빛 바랜 영광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동독에도 물론 축구연맹(DFV)과 프로리그(DDR-Oberliga)가 있었다. 오버리가는 1부 리그라는 뜻인데, 공식적으로는 50년에 시작해서 91년까지 41회의 마이스터를 가려왔다. 최다 우승팀은 10회 우승의 BFC 디나모로, 78∼88년 동안 연속 10회 우승의 경이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다. FC 디나모 드레스덴이 7회로 그 다음을, SC 비즈무트 칼-마르크스-슈타트가 4회, FC 마그데부르크가 3회, FC 칼 차이스 예나가 2회를 기록했다.

동독의 축구협회컵인 DFV포칼 또한 49년부터 91년까지 이어져 왔었다. FC 디나모 드레스덴이 6회로 최다 우승을 기록했고, FC 로크 라이프치히와 FC 마그데부르크가 4회, BFC 디나모와 FC 칼 차이스 예나가 3회 우승을 한 기록이 보인다. 이로 미루어 보자면 BFC 디나모, FC 디나모 드레스덴, FC 마그데부르크 그리고 FC 칼 차이스 예나가 동독의 대표적인 클럽이었음을 알 수 있다.

91/92 시즌의 분데스리가는, 90/91 시즌 동독의 마지막 오버리그 우승팀 FC 디나모 드레스덴과 DFV포칼 우승팀인 한자 로스토크에게 출전을 허락하며, 두 팀을 포함해 20팀으로 경기를 치르는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65/66 시즌부터 16팀에서 18팀으로 확대 개편한 뒤 분데스리가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만큼 동독 우승팀에 대한 예우는 실력으로도, 국민 감정적으로도 소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의 독일축구연맹에서는 옛 동독 클럽들의 기록까지도 보관하고 있는데, 그 자료에 의하면 승률에 의한 동독 클럽들의 랭킹은 다음과 같다.

1위는 FC 칼 차이스 예나, 2위는 BFC 디나모, 3위는 FC 디나모 드레스덴 그리고 FC 마그데부르크는 7위에 올라있다.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라 불리는 인구 45만의 아름다운 도시이고, 25만 명이 사는 마그데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창업군주 오토 1세가 잠들어 있는 공업도시이며, 세계적인 광학 메이커인 '차이스'의 본사가 있는 인구 9만의 예나는, 독일 정신사의 중심에 위치하는 조용한 도시이다. 인구 340만의 수도 베를린, 170만의 함부르크, 120만의 뮌헨과 같은 서독의 거대도시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동독의 도시들도 특색을 가지고 자기 고장의 축구클럽을 발전시켜 온 것이다. 동독의 40년 축구역사를 무의미하게 생각하는 것이 큰 잘못임은 당연하다.

동독 국가대표 선수들의 기록과 독일 축구계에서 그들의 위상을 살펴보자. 최다 출전자는 요아힘 슈트라이히로서 102회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다음엔 한스 위르겐 되어너가 100회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고, `74 월드컵 주전 골키퍼로 활약한 위르겐 크로이가 94회의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역시 `74 월드컵 당시에 중앙 수비수로 활약한 콘라트 바이제가 86회로 4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 동독 선수들의 출장기록은 지금의 독일축구협회에서도 그 기록이 공인되고 있다.

득점순위는, 지난 4월에 50회 생일을 맞이한, 최다 출전자 슈트라이히가 55골로써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동독 오버리가에서 378경기에 나서 229골을 기록했던 이 전설적인 마그데부르크의 사나이는 당시, 영국의 유명한 축구잡지 '월드사커'에서 "그는 하나의 '현상'이다"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그는 지금 마그데부르크에서 스포츠용품 회사에서 판매원을 하고 있는데, 동독축구의 몰락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다.

2위는 `74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뛰어난 왼쪽 미드필더 한스 위르겐 크라이쉐로서 25골을 기록했고, 에버하르트 포겔도 같은 숫자의 득점기록이 보인다. 6위에는 작년에 34살로 헤르타 베를린에서 은퇴한 공격수 안드레아스 톰이 올라있는데, 그는 현재 헤르타 베를린의 아마추어 팀의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동독 대표로 51경기를 뛰었고, 통일 뒤에도 독일 국가대표로서 10경기를 소화한 베테랑이었다.

그리고 현 레버쿠젠의 주장이면서 유명한 골게터인 울프 키어스텐도 14골을 기록했었다. 36살의 이 노장은 동독 대표로 49경기를, 통일 독일 대표로 51경기를 뛰어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상태이다. 얼마 전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 때, 그를 뽑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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