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견 그럴 듯해 보인다. 비록 동네축구지만 매주마다 ‘뽈’을 차야 직성이 풀리는 나 역시 어떤 ‘힘’의 신봉자이자 ‘공격적 남성성’을 희구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용에서는 월등히 앞섰지만 득실점으로 승패가 엇갈릴 때는 정말 국제축구연맹(FIFA)에 룰을 바꿔달라고 요구하고 싶을 정도다. 그 뿐인가. 축구장이 광기어린 민족성의 난장판이 되는 경우 역시 실제로 많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사실의 부분만을 지적했을 뿐이다. 단언컨대 그들은 축구장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채 TV로 몇 번 보고 나서 섣부른 개인적 취향을 얘기했을 뿐이다. 이는 록 음악을 한번도 듣지 않은 사람이 록을 악마적인 퇴폐문화라고 일축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다.
축구는 승부를 가르는 경기다. 그러나 사실 모든 스포츠가 온 힘을 다해 승부를 다툰다. 축구의 슛에서 남성적 힘을 보았다면 그는 슬램덩크나 홈런, 심지어 공사판의 굴착기나 전봇대에서도 남성성만을 떠올릴 것이다. 가히 병적이다.
화려한 골 세러모니를 두고 힐난한다면 이 역시 축구의 원리를 모르는 태도다. 축구는 90분 내내 운동장을 달리지만 골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농구는 대략 200점, 배구는 50점, 핸드볼 역시 60점 내외를 얻는다. 하지만 축구는 두세골 뿐이다. 운명적인 희소성이 선수들의 심박수를 뒤흔든다. 게다가 축구는 다른 경기와 달리 골을 넣고 나면 재빨리 자기 진영으로 뛰어와야만 한다. 이왕이면 멋있게 뛰어오고 싶은 것은 모든 선수의 욕망이다.
과정보다 결과만 중시한다는 지적 역시 TV로 축구를 본 사람의 근시안이다. 카메라는 공만 따라다닌다. 그 순간 화면 바깥의 황선홍이 멀뚱히 서있는 게 아니다. 화면만 보면 황선홍의 진가를 모른다. 경기장에 가야 황선홍이 어떻게 수비진과 골키퍼 사이에 공간을 창출하고 그 텅 빈 여백을 향해 대각선 질주를 감행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매번 황선홍이 골을 넣지는 못한다. 헛발질에 홈런볼도 자주 찬다. 그렇지만 언제나 황선홍은 축구에 있어 ‘과정’이 얼마나 중요하고 아름다운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골을 넣지는 못해도 그 과정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찬사를 보내는 것이 축구의 미학이다. 그런데 이는 경기장에 가야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TV 앞에 웅크린 사람만이 축구가 결과만 중시한다고 비난하고 황선홍은 ‘똥뽈’만 찬다고 투덜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축구가 과잉된 민족성의 전시장이라구? 일리 있는 지적이다. 인종차별 의식과 근육의 힘만을 신봉하는 유럽의 훌리건이 대표적이다. 대표팀 경기만 열광하는 우리의 비정상적인 축구문화 역시 과잉된 민족성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역시 좀더 섬세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점 다음 기회로 미룬다.
정윤수/스포츠문화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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