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아이러니인가? 약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은 세계적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겼고, 우리의 현대사는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질곡의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정보혁명, 세계화, 문화적 충돌이라는 세계사적 소용돌이를 지나고 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21세기 문턱에서 우리는 일본과 대등하게 세계 최고의 스포츠제전을 아시아 최초로 개최하는 것이다.
월드컵은 우리에게 무엇이어야 하는가? 일제의 식민통치와 6.25전쟁은 우리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모두를 황폐화시켰다. 88올림픽이 전쟁의 폐허로부터 물질세계를 다시 재건했음을 세계에 각인시킨 사건이라면, 2002월드컵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로 세운 것을 우리 스스로 확인하고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사건이어야 한다.
그 동안 우리는 물질세계에서 놀랄 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섬유, 건설, 철강, 조선을 거쳐, 자동차, 반도체, 정보통신기기, 차세대 TV에 이르기까지 세계 시장에서 뒤지지 않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많은 것을 잊고 또 잃고 살았다. 바로 보이지 않는 세계다. 원칙, 신뢰, 도덕성, 합리성, 창의성, 질서, 시스템, 문화와 같은,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돈으로 살 수도 없는 세계 말이다. 이것들이야 말로 선진사회로 도약하기 위한 충분조건이자 앞으로 21세기 경쟁력의 핵심적 요소들이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의 붕괴사건, 그리고 한국을 부도직전까지 몰고 갔던 IMF위기는 무엇을 말해 주는가? 지금도 매일 접하는 각종 정치문제, 사회문제, 교육문제는 우리에게 같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발전 없이는 더 이상 보이는 세계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변화는 시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월드컵과 같은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국가적 행사는 이러한 변화를 앞당길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언제 다시 개최할 수 있을 지 모르는 월드컵을 단순히 규모가 큰 스포츠대회로만 생각하지 말자. 남의 일로도 여기지 말자. 우리 자식들이 살아갈 이땅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로 세우는 계기이자, 성공적인 세계인의 축제로 만들어 보자.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일본과 함께 아시아의 리더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우리 자신에게 그리고 세계에 보여주자.
강준호/본보 월드컵 자문위원·서울대 교수 kangjh@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