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영국의 축구문화]<상>종주국 자존심 지키는 팬들

  • 입력 2002년 4월 25일 18시 08분


크리스탈 팰리스 축구클럽의 경기를 관전하는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응원을 하고 있다.
크리스탈 팰리스 축구클럽의 경기를 관전하는 관중들이 열광적으로 응원을 하고 있다.
《‘축구 종주국’ 영국은 세계 축구의 진원지라는 자존심과 함께 훌리건(경기장 난동군)의 발생지라는 오명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영국 외무성은 최근 2002월드컵을 앞두고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의 기자들을 초청, 영국축구의 현장을 공개했다. 리버풀, 아스날 등 잉글랜드 명문 축구클럽 시찰과 잉글랜드-파라과이 평가전 관람, 응원 조직 임원과의 만남 등으로 짜여진 일정이었다. 영국의 축구문화를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축구 종주국’ 영국은 세계 축구의 진원지라는 자존심과 함께 훌리건(경기장 난동군)의 발생지라는 오명을 동시에 갖고 있다.

과연 그런가. 영국 외무성은 최근 2002월드컵을 앞두고 개최국인 한국과 일본의 기자들을 초청, 영국축구의 현장을 공개했다. 리버풀, 아스날 등 잉글랜드 명문 축구클럽 시찰과 잉글랜드-파라과이 평가전 관람, 응원 조직 임원과의 만남 등으로 짜여진 일정이었다. 영국의 축구문화를 상,하로 나눠 살펴본다.

17일 영국 리버풀 안필드 구장. 이날 오후 8시에 벌어지는 잉글랜드 대표팀과 파라과이 대표팀과의 평가전을 보기 위해 경기 시작 서너시간 전부터 관중들이 입구 쪽에 줄을 서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하는데도 사람들은 계속 불어났다. 잉글랜드의 상징인 붉은색 십자가가 그려진 큰 천으로 몸을 두른 사람들, 양 옆에 뿔이 달린 ‘스벤스 아미(Sven’s Army·스벤 고란 에릭슨 감독이 이끄는 영국팀에 대한 애칭)’라고 적힌 모자를 쓴 사람들 등 각양 각색의 축구팬들이 모려들었다.

곧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라과이 선수단을 태운 버스가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자 잉글랜드 팬들이 ‘훌리건’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버스가 지나갈 길을 터주며 큰 박수로 맞이한 것이다.

잉글랜드-파라과이의 평가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잉글랜드 축구팬이 경기장 밖에서 경찰의 통제 아래 질서정연하게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리버풀〓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이 날 경기는 잉글랜드가 21명의 선수를 풀가동하면서 한수 위의 기량으로 파라과이를 시종 압도, 4-0이라는 큰 점수차로 이겼다. 경기장을 가득 채운 4만2000여 관중은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지치지도 않고 “잉거랜드, 잉거랜드(잉글랜드를 잉거랜드로 발음한다)”라고 구호를 외쳐댔고 선수들의 멋진 동작 하나하나에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을 보냈다. 축구 경기장은 축구 팬들이 중심이 된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경기장 치안을 맡고 있는 머지사이드 경찰 당국은 250명의 경찰과 자원봉사자 500명의 비교적 적은 인원을 투입했지만 관중들은 질서정연했고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 축구의 중심축은 축구팬’〓영국 축구의 발전은 팬들로부터 나온다. 2000년 한해 동안 영국 국민들 2600만 명이 프로 축구 경기장을 찾았다. 티켓 수입에 상당부분 의존해야 하는 축구 클럽들로서는 클럽 운영에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영국 축구팬들은 경기를 관전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조직적인 활동을 통해 축구 전반에 상당한 영향력까지 행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코벤트리 시티 축구 클럽의 팬들은 자비를 들여 클럽의 축구구장인 하이필드 로드 구장에 관중석을 증축하기도 했다.

영국에는 각 축구 클럽별로 독립된 응원단체가 있으며, 전국적 규모의 응원 조직으로는 1927년에 생긴 ‘전국 축구 응원단 클럽 연맹(NFFSC)’와 1985년에 생긴 ‘축구 응원단 연합(FSA)’이 있다.

현재 10만여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는 FSA는 팬들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정부와 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88년 훌리건을 단속하기 위해 모든 축구 팬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려는 정부의 계획을 대규모 캠페인을 벌여 무산시킨 것이 하나의 예다.

▽사라지는 ‘훌리거니즘’〓영국 축구팬의 경기장에서의 난폭하고 거친 행동은 ‘훌리거니즘’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고, 잉글랜드 축구팬들은 훌리건의 상징처럼 됐다. 그러나 1960년대 나타나 70, 80년대 절정에 달했던 훌리건들은 이제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입장 티켓 가격이 비싸져 거친 노동자 계급 관중들을 배제하게 된 것도 부분적인 이유지만, 그동안 응원단 협회 자성의 목소리, 경찰 당국의 강력한 대응 노력, 프로 축구 선수들의 다국적화 등이 함께 어우러진 결과다.

이번 일정동안 만난 영국 내무부, 축구협회, 경찰당국, 응원 조직 임원들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더 이상 훌리건은 없다”고 강조했다. 응원단 협회 케빈 마일스씨(42)는 “훌리건들이 극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축구팬 전체를 훌리건으로 보는 국제사회의 시각이 크게 우려된다”며 “우리를 훌리건이 아닌 순수하고 열정적인 축구 팬들로 보아달라”고 말했다.

내무부와 경찰 당국은 월드컵을 앞두고 ‘훌리건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932명의 여권을 압수해 출국 자체를 봉쇄하고 월드컵 기간 중 문제를 일으키는 영국인에게는 10년 동안 축구 경기를 관람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처벌할 방침을 세우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리버풀〓김성규기자 kim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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