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협연이나 교향악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 경우 2층 앞 열이 명당이다. 1000명의 연주자와 합창단을 필요로 한다는 말러의 8번 교향곡은 고사하고 소규모로도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교향악 역시 2층 앞 열이 음향학적 풍족감을 선사한다. 더구나 귀빈석에 눌러앉은 ‘내외빈’의 다소 과장된 문화귀족적 잡담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음악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본질적 장점이 제공된다.
미술 관람 역시 마찬가지. 지금 경복궁 앞에서 열리고 있는 박수근 전시회를 가보자. 어린이들의 손장난을 막기 위해 1m 쯤 앞에 줄을 쳐놓았는데 그래도 가급적 바짝 다가가 저 50년대의 신화를 참례해보자. 다가갈수록 당신은 박수근의 그 질박한 서정이 기괴한 열정의 붓터치로 짓이겨진 것임을 알게 된다. 옛 시골의 흙담이나 곰보딱지 얼굴처럼 박수근은 무채색의 물감을 점을 찍듯이 수십차례 짓이겨놓았는데 그 순간 당신은 박수근 신화의 진정한 내면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서서히 물러서보자. 조금씩 물러나면서 주의깊게 화면을 바라보면 뒤엉킨 물감 덩어리들이 하나의 형상으로 합치되는데 급기야 당신은 그것이 한 폭의 고즈넉한 풍경화가 아니라 당시 민중의 거칠고 고단한 삶의 생생한 초상화임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그 어떤 사물이든 망원경과 현미경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축구장은 어떨까. 축구장에도 귀빈석, 특석, VIP석, 본부석 등의 이름이 붙은 자리가 있다. 단언컨대 우연히 생긴 초대장이 아니라면 이 자리는 피하는 게 좋다. 비교적 관람하기 좋다는 장점이 있지만 축구의 미학과 에너지를 만끽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 중에도 물론 축구팬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에너지란 없는 돈을 쪼개 입장권을 사서 일반석에 몰려 앉은 사람들의 광기에 미치지 못한다. 비교적 앞뒤 거리가 넓어서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다. 그래야 귀빈석에 앉은 테가 나는 것이다. 그 뜨거운 파도 타기 응원의 물결이 몰아쳐올 때도 이들은 괄약근조차 움찔하지 않는다.
게다가 귀빈석은 ‘귀빈’ 숫자보다 더 많은 진행요원, 안전요원이 진을 치고 있어서 귀빈 대접을 받기 보다는 ‘더 높은 귀빈’을 위한 과잉 경호에 시달릴 뿐이다. 우연히 초대장을 얻어 귀빈석에 앉는 사람과 구둣발로 잔디 구장을 짓밟고 다니는 진짜 귀빈 사이에서 극심한 계급 위화감까지 느껴질 판이다. 지난 토요일, 인천 문학경기장이 그랬는데 일반석에서는 뒷 통로로 나가면 곧 화장실로 갈 수 있었지만 귀빈석은 수많은 경호원의 지나친 인솔을 받아가며 외딴 곳 통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귀빈석에 초대받고서도 천민 취급받다보면 문득 신경림의 시 ‘파장’의 앞머리가 생각난다.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그러니 서둘러 일반석으로 가자. 축구는 현미경보다 망원경이 필요한 경기다. 귀빈석 앞 열에 앉으면 축구장 전체를 조망할 수 없고 안전요원의 뒷통수를 바라보게 된다. 겨우 엉덩이를 들고 보면 선수들이 낮은 시야로 겹쳐 보이기 때문에 입체적인 관람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석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텔레비전으로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장관이 펼쳐진다. 홍명보의 폭넓은 시야, 김남일의 성실하고 안정된 플레이, 이천수의 쾌속질주, 그리고 황선홍의 공간 창조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게다가 ‘못난 놈들’끼리 어울리지 않았는가. 야유와 함성, 어깨춤과 파도 타기, 붉은 옷을 맞춰 입고 손뼉을 치다보면 저 맞은 편 귀빈석에 억지로 어깨에 힘주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축구 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