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발견으로 요약되는 90년대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결절점으로 이 시대에 이르러 축구는 ‘대한 건아’들의 ‘국위선양’이 아니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현대 사회의 구경거리라는 속성까지 갖게 되었다. 입에 거품을 무는 해설이 아니라 축구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체계적인 정보와 깊이있는 분석, 여기에 약간의 흥행성까지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신문선과 이용수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해설가였다. 어금니를 꽉 다문 듯 박력 넘치는 신문선과 텔레비젼을 축구 강의실로 격상시킨 이용수의 등장은 국제 수준에 근접한 한국 축구 발전의 반영이며 구경거리로 넘쳐나는 90년대의 거울이기도 했다. 그리고 월드컵을 앞둔 지금 차범근과 허정무까지 가세하여 신문선과 더불어 ‘3강 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이제서야 축구 해설은 다른 문화 장르에서 ‘해설’이나 ‘비평’이 갖는 의미에 어느정도 육박하게 된 것이다.
요컨대 해설이란 싱싱한 횟감을 능란하게 다루는 요리사의 칼질처럼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그저 신바람을 주체못해 제 맘대로 칼질을 하는 게 아니다. 그 분야의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각 경기의 순간적 상황에 대해 섬세하고 치밀한 분석을 시도하는 해설이 이젠 필요하다.
축구장에서 직접 뛰면서 해설하는 듯 넘치는 순발력과 에너지로 유명한 신문선, 골인 상황에도 치밀하고 분석의 칼을 놓지 않는 허정무, 안타까운 상황을 더욱 애타게 만드는 감탄사로 선수들을 격려하며 경기 전체 흐름을 짚어주는 차범근. 이 세 사람의 독특한 개성은 우리 축구의 발전 양상을 대변하는 것이며 이번 월드컵의 또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도 크다. 특히 우리 축구의 상징적 존재인 차범근과 허정무가 그라운드가 아니라 중계석에 앉아있는 모습은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물론 그들이 아니라면 축구 해설은 알맹이 없이 무미건조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축구의 상징이 되는 두 사람이 실전의 벤치가 아니라 마이크에 열변을 토하는 모습은 어색하기만하다.
어느 한 팀을 선뜻 맡기 어려운 속사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원하는 국내외 프로 구단은 얼마든지 있다. 너무 앞질러 가는 얘기지만 히딩크 이후까지 생각한다면 차범근, 허정무 이 두 사람이 ‘전직 대표팀 감독’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장의 벤치에서 고함을 지르는 이 두 사람의 축구를 다른 누군가가 해설하는 모습, 그 아름다운 혈투를 보고 싶다.
축구 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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