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선동렬이 일본에서 날릴 때다. 당시 주니치 드래건스의 사령탑은 올시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한신 타이거스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 어렵사리 인터뷰 승낙을 얻어낸 기자는 경기전 짬을 내 더그아웃에서 그를 만났다. 호시노는 아직도 선수들에게 매를 드는 ‘열혈남아’라는 별명이 무색할 만큼 환한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긴장이 풀어진 탓이었을까. 기자는 국내에서 하던 대로 그의 바로 옆에 앉아 다리까지 꼬고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통역을 맡았던 최인호씨는 우리가 앉은 벤치앞 바닥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바짝 엎드린 채 쥐구멍을 찾고 있었다.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기자는 대한 남아의 기개를 살려 끝까지 인터뷰를 강행했다. 하지만 그날 기자의 가슴 한 구석엔 그들의 관례를 무시한 데 대한 미안한 감정이 남은 게 사실이다. 기자조차도 감독 앞에선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게 일본의 현실.
국내와 미국 프로야구는 이 정도는 아니지만 최소한 감독의 작전권에 대해서만은 치외법권적인 예우를 한다. ‘1사후인데 왜 보내기 번트를 했는가’라든가 ‘그때 투수를 꼭 바꿔야만 했나’라는 질문은 실례인 것이다.
하지만 17일 잠실구장에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이날은 ‘돌아온 야생마’ 이상훈이 4년 7개월만에 복귀 신고식을 한 날. LG 김성근감독은 경기전 “팬들이 이렇게 많이 오셨는데 웬만하면 이상훈을 등판시키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LG가 기아에 2-3으로 뒤진 가운데 9회초 2사후가 되자 관중석에선 목이 메이도록 ‘이상훈’을 연호했지만 김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불펜에서 몸을 풀며 시위를 했던 이상훈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더그아웃으로 자리를 감췄고 기자실에선 이를 두고 열띤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연 그래야 했을까. 찬반 양론이 있긴 했지만 기자는 전적으로 김감독의 입장을 지지하는 쪽이다. 이날은 경기 내내 비가 내린 가운데 8회부터 빗줄기가 굵어졌고 1점차의 박빙 승부에서 데뷔전을 치를 이상훈에 대한 배려가 팬서비스보다 중요하다는 게 김감독의 생각이었으리라.
불행하게도 LG는 기아와의 주말 3연전을 모두 내줘 김감독에 대한 비난은 가중됐겠지만 팬에 앞서 선수를 우선으로 여기는 김감독의 충정이 좀더 널리 알려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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