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한국과의 경기를 중계한 ‘TV 폴란드’ 방송의 아나운서는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과의 경기가 끝난 뒤에도 폴란드 국민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TV 앞을 떠나지 못했다.
전반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한국팀에 0-1로 리드당하기는 했지만 한국팀보다 객관적 전력이 앞서는 자국팀이 역전할 것이란 게 폴란드 국민의 기대였다. 그러나 그 일말의 기대마저 한국팀이 한 골을 더 넣으면서 사라지자 폴란드 전체가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폴란드주재 한국 대사관(대사 송민순·宋旻淳) 관저에 초청 받아 한국 교민들과 함께 경기를 보던 폴란드인들 가운데는 자국팀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도리어 한국팀을 응원하는 사람도 있었다. 초청 받은 한 폴란드 언론인은 “0-2라는 스코어가 문제가 아니다. (우리팀의) 경기 내용은 그보다 훨씬 떨어졌다”고 분개했다.
바르샤바시 문화과학궁전에 초청 받아 경기를 관람하던 폴란드 인사 가운데는 폴란드팀이 첫 골에 이어 둘째 골까지 먹자 밖으로 나가버리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고 한국 대사관 권태면(權泰勉) 참사관은 전했다. 바르샤바 시민들이 함께 경기를 관전한 폴란드식 바가 밀집돼 있는 구 시가지 광장 인근은 경기가 끝난 뒤 시민들이 분노를 토로하는 장소로 변했다.
대형 TV를 설치하고 교민들과 함께 경기를 관람했던 대사관저는 흥분의 도가니로 변했다. 바르샤바 거주 교민 김식(金湜·역사학 박사)씨는 “폴란드에 산지 11년 만에 이렇게 감격스러운 순간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다른 교민은 “폴란드 외국 투자 기업 중 투자액 1위를 기록했던 대우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폴란드 내에서 한국 이미지가 많이 실추됐었다”며 “이번 승리로 폴란드인들이 한국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 흥분했다.
대사 관저에서 한국측 표정을 취재하던 폴란드 언론인들은 “최근 평가전에서 일본에 패배하는 등 나약한 모습을 보였던 게 그대로 재현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이날 폴란드 언론에는 지난 밤 폴란드팀이 묵고 있는 부산 웨스틴조선비치호텔 앞에 한국인들이 몰려와 소란스럽게 하는 바람에 폴란드 선수들이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는 기사가 게재돼 폴란드 국민감정을 자극했다. 폴란드 축구협회장이 방송에 나와 “시끄러웠던 곳은 선수들의 방 쪽이 아니라 감독 방이 있는 쪽”이라고 해명했다.
대사관측은 한-폴란드 전에서 폴란드가 패배함에 따라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폴란드 훌리건의 난동을 우려, 대책을 강구했다. 최근 바르샤바에선 축구 경기후 흥분한 훌리건들이 바르샤바 구 시가지의 상점가를 파괴, 큰 재산피해를 내기도 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phark@donga.com
▼“우리도 해내자”1승 염원 간절
○…한국과 폴란드전은 이날 일본에서도 후지 계열 TV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돼 일본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일본 방송들은 뉴스를 통해 “한국이 시종 우세를 보이며 놀랄 만한 투지로 승리를 얻었다”며 “한국 축구가 괄목하게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중국 일본 한국이 동시에 출전한 이날 일본인들은 첫 출전한 중국이 코스타리카에 석패하고, 두 번째 출전한 일본이 벨기에에 호각의 게임을 벌여 처음으로 승점을 올린 데 이어, 한국이 강적 폴란드를 2-0으로 제압하자 “출전 경험에 따른 결과가 나왔다”며 한국의 승리를 축하했다.
4일 일본 사이타마에서 열린 일본-벨기에전에서 일장기로 가슴을 감싼 일본 여성 축구팬이 일본의 승리를 외치며 열렬히 응원하고 있다. 사이타마〓AFP뉴시스
월드컵 공식 신문인 아사히신문의 오기야 다다오(荻谷忠男) 월드컵 취재본부장은 “한국의 승리는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의 의미를 더욱 깊게 했다”며 “일본전과 한국전이 열린 4시간 동안 일본과 한국이 더욱 가까워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도 잘 싸웠지만 우리도 하루빨리 한국이 느낀 승리의 감격을 맛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아사히신문은 이날 한국전 경기가 끝나자마자 ‘한국, 월드컵 첫 승리’라는 제목으로 ‘속보 호외’를 발행했다. 이 호외는 아사히신문이 경기장이 있는 10곳과 도쿄(東京) 후쿠오카(福岡) 나고야(名古屋) 등 13곳에 설치한 ‘뉴스 스퀘어(뉴스광장)’에서 발행하는 것으로 한 곳에서 3000여장씩 모두 4만여장을 발행해 행인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이 호외는 아사히의 홈페이지(asahi.com)에 올려 네티즌들이 컬러프린터로 뽑아 기념으로 가질 수 있다.
○…일본과 벨기에전이 열린 4일 오후 6시부터 일본열도는 들썩였다. 그러나 거리는 차량과 행인이 줄어들어 오히려 조용했다. 2-2로 비긴 데 대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아쉽다, 그러나 잘했다”고 말했다. ‘아쉽다’는 것은 호각의 경기를 벌이며 이길 수도 있었던 게임을 놓쳤다는 것이고, ‘잘했다’는 것은 H조 최강의 팀인 벨기에와 비긴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
이날 거의 빈자리 없이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메웠던 관객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스타디움을 뒤로 했다. 일본이 예상외로 선전을 펼치자 일본 국민들은 “다음 게임에서 러시아는 이길 것”이라며 “16강도 문제없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날 일본의 대형 건물들은 남아서 함께 경기를 보는 사람들로 인해 환하게 불을 밝혔으며 환호성이 밖에까지 터져 나왔다. 젊은이의 거리인 도쿄(東京) 시부야(澁谷)와 하라주쿠(原宿) 등의 음식점과 카페 등에는 일본 대표팀의 유니폼을 입은 서포터스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일본은 이번 경기에 대해 ‘역사적’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우선 승점 1점을 얻은 것에 대해 큰 만족감을 표시했다. 월드컵 출전 두 번째인 일본은 첫 출전한 98년의 프랑스대회에서 3패를 해 승점을 얻을 수 없었다.
또 비록 한때이긴 했지만 2-1로 리드한 것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이 월드컵에서 리드를 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또 비기긴 했지만 2점을 따낸 것도 일본의 자랑. 일본팀도 공격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선수들이 다음 경기에서도 선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필립 트루시에 일본팀 감독도 경기가 끝난 뒤 흥분된 어조로 만족감을 표시했다. 그는 “일본은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훌륭한 결과를 얻었다”며 “비기긴 했지만 공격력을 보여준 역사적인 경기였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선수들의 몸이 굳어 있는 등 문제점이 있긴 했지만 조금 지나 현명하고 성숙하게 공격력을 살려 좋은 경기를 벌였다”며 “나는 만족하고 나머지 두 경기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역전골을 성공시킨 이나모토 준이치(稻本潤一·영국 아스날) 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 “벨기에는 예상대로 강한 팀이었다”면서도 “우리도 하면 된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여유를 보였다.
도쿄〓심규선특파원 ksshim@donga.com
▼“세계의 벽은 높았다” 13억대륙 허탈
월드컵 본선 무대에 처녀 출전한 중국팀이 코스타리카와 첫 경기를 가진 4일 중국 전역은 축구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마침 이날은 민주화 유혈사태를 빚은 톈안먼(天安門)사건 13주년이기도 해 중국 당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곳곳에서 경계와 보안을 강화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축구가 중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임을 입증하듯 이날 중국인들의 눈과 귀는 온통 한국 광주로 쏠렸다. 베이징(北京) 시내는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차량들이 급격히 줄어들어 한산한 모습이었고 경기가 시작되면서 직장인들은 일손을 놓은 채 삼삼오오 TV 앞에 모여들었다.
일부 직장과 학교에서는 축구를 볼 수 있도록 이날 오후 휴무 또는 휴교를 했다. 차오양(朝陽)공원과 르탄(日壇)공원 등 베이징의 크고 작은 공원들에는 대형 TV스크린이 설치돼 시민들이 수십, 수백명씩 모여들어 중국팀을 열렬히 응원했다. 특히 르탄공원에서는 중국 맥주회사들이 무료 시음축제를 열어 축구팬들의 흥을 돋우기도 했다.
“아니, 저럴수가.”중국 베이징 시내에서 중국-코스타리카전 실황 중계를 지켜보고 있던 중국인들이 코스타리카가 골을 터뜨리자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베이징AP연합
베이징의 최대 번화가인 왕푸징(王府井)과 시단(西單), 푸싱(復興)상업성(城) 등 10여개의 대형 백화점 및 쇼핑센터의 가전매장에서도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지나가던 축구팬들이 경기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언론들은 7억명의 중국인들이 자국팀 경기를 TV로 지켜봤던 것으로 추산했다.
○…TV를 통해 경기를 지켜보던 중국인들은 전반에 중국팀이 선전하던 것과 달리 후반에 너무나 쉽게 두 골을 허용하자 실망과 함께 탄식을 터뜨렸다. 베이징의 한 정보기술(IT)업체에 근무하는 쑨후이밍(孫惠明·42)은 중국팀이 경기에 지자 “C조에서 가장 약한 상대인 코스타리카는 해볼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쉽다”면서 “같은 조의 브라질과 터키는 객관적 전력에서 코스타리카를 훨씬 앞서는 만큼 남은 경기에서 이기기는 더욱 어려워 보인다”고 중국팀의 16강 진출을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베이징 하이뎬(海淀)구의 한 음식점에서 친구들과 함께 중국팀을 응원하던 대외경제무역대 여학생 장메이(張寐·22)는 “역시 경험 부족과 실력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면서 “월드컵에 처음 나간 중국팀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잘 뛴 만큼 이번에 비록 졌다 하더라도 다음 경기에서는 더욱 잘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월드컵이 개막되면서 중국 음식점과 술집에서는 맥주를 30∼50% 싼 가격에 팔거나 음식을 시키면 맥주는 아예 무료로 제공하는 곳도 많아 맥주 소비량이 급증했다.
칭다오(靑島)맥주와 함께 중국의 2대 맥주로 꼽히는 옌징(燕京)맥주는 월드컵 개막 이후 1일 생산량이 평소의 2배에 가까운 3500t으로 뛰어올랐고 특히 중국팀 경기가 열린 4일에는 4000여t의 기록적인 생산량을 기록했다고 중국 언론이 전했다.
○…중국 당국은 1989년 6월4일 일어난 톈안먼 사건 13주년인 이날 베이징 중심가의 톈안먼 광장 주변에 정사복 공안 요원들과 차량을 대거 배치하는 등 삼엄한 경계를 폈다.
특히 중국 당국은 반체제 인사들이 월드컵 기간중 톈안먼 광장에서 시위를 벌여 이 장면이 국제사회에 방영되는 것을 우려해 주요 인사들을 사실상 가택연금하거나 이들의 출입과 일거수 일투족을 집중 감시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날 시민들의 관심이 온통 축구경기에 쏠려서인지 시위 등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중국 언론들은 중국팀의 첫 경기가 벌어지는 광주는 한국 5대 도시 중 하나로 예술의 고장이라고 소개하면서 광주 시민들이 중국팀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광주는 중국 남부의 광저우(廣州)와 자매결연을 한 도시로 광주에서의 중국팀 첫 경기를 축하해 이번 월드컵 기간중 ‘광주·광저우 문화제’를 여는 등 중국팀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고 있다고 전했다.
베이징〓황유성특파원 ys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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