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전 필승 응원차 거리로 나서면서 나는 뜬금없이 백석의 시집을 손에 쥐었다. 광화문으로 가는 흔들리는 전철 안에서 내내 백석의 시를 읽었다. 빗줄기 굵어지는 광화문 대로를 낯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울울히 걸어가며 방금 읽은 시를 기억했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 좋은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은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미국전 무승부 직후, 광화문 뒷골목. 비는 죽죽 내리고, 더러는 소주집에 앉아 아쉬움을 달래고, 더러는 호프집에 앉아 다음 포르투갈전을 분석하는데, 나는 바람 불고 비 내리는 밤길을 늦도록 헤매다녔다. 내가 모닥불에 모여 앉은 당신들을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축구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비에 젖어가는 몸을 서로 내보이며 두 시간을 함께 열광한 낯선 당신들을 사랑하는 탓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 여기다! 하고 달려갈 때 유독 혼자서 저기다!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사람, 시인은 재즈풍으로 말할 것이다. 당신이 축구를 아느냐? 그래, 우리가 언제 축구를 진정 알기나 했던가. 하물며 사랑이라니. 밤 긴 줄 모르고 인터넷에 중독되었던 당신, 인간의 발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신통치 않게 흘려버렸던 당신, 나는 그래도 주책없이 당신에게 고백하고 싶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도 될까요? 이제라도 당신은 죽을 때까지 축구를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었다는 사실! 당신을, 이 나라를,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 당신을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함정임소설가etrelajiha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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