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우린 기적을 만들었다”

  • 입력 2002년 6월 19일 00시 50분


“응원전도 이겼다”-권주훈기자
“응원전도 이겼다”-권주훈기자
안정환 선수의 헤딩슛이 골문을 지나 그물에 걸렸다.

그 순간, 서울 광화문 거리와 시청 앞 광장, 그리고 종로 거리는 하늘을 향해 양손을 내지르며 터뜨리는 수많은 인파의 함성에 뒤덮였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엄마!” 고교 3학년인 이수진양과 이슬양은 부둥켜안고 엄마를 불렀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고 울부짖었다. 함성과 축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밤하늘을 수놓았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고 월드컵 8강에 올라선 18일 오후 10시53분. 서울 거리는 온통 환희의 도가니로 변했다.

따가운 햇빛 탓이었을까. 이날 낮 서울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경쾌한 표정이었다. ‘우리의 숙원은 월드컵 1승이었지, 그래 16강이었지’ 하는 생각들로 꽉 차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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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대∼한민국”을 선창해도 사람들은 김밥을 먹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무관심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섭씨 30도의 무더위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박규섭씨(51·서울 성북구 정릉동)를 따라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온 정신지체아 은욱이(14)는 이런 분위기를 아는지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경기 시작이 다가오면서 ‘붉은 악마’들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이 덕수궁 대한문 현판을 흔드는 듯했고 ‘오 필승 코리아’가 세종로를 가득 메웠다.

승리 기원 공연을 나온 안치환의 노래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가 울려 퍼지자 시민들은 어느새 ‘태극전사’로 바뀌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안정환이 페널티킥을 놓쳤다. 탄식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모두 침착했다. 곳곳에서 “괜찮아, 힘내라”고 외쳤다. 안정환을 믿었기 때문이었을까.

곧 이어 1골을 허용했을 때도 아주 잠깐 멈칫했을 뿐 시민들은 목이 쉬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격려를 보냈다.

이대로 지고 마는가 싶던 후반 42분.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누구 하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옆 사람의 손을 더 세게 잡고 하늘을 향해 외쳐댔다. 하늘이 듣기라도 했을까. 설기현 선수의 왼발 슛이 이탈리아 골문을 갈랐다. 폭죽이 터지고 모두가 일어섰다. 연장전이 시작돼도 앉지 않았다. 아니 앉질 못했다.

그리고 연장 후반이 끝나갈 무렵 안정환의 헤딩슛이 골문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을 사람들은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자신의 팀은 이미 탈락했지만 한국 국민의 응원을 잊지 못해 귀국을 미루고 시청 앞 광장에 나온 아일랜드인 더모트 버크(38·목수)는 “누가 한국이 월드컵 개최 자격이 없다고 했어”라며 감격했다.

시민들은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밤이 새도록, 목이 쉬도록 ‘아리랑’과 ‘대한민국’을 부르고 또 외쳤다.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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