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8강 신화, 숨죽였던 광화문 그 현장을 가다

  • 입력 2002년 6월 19일 04시 56분



'한국 축구, 8강 신화 창조의 순간'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운 '붉은 악마'를 비롯한 시민들은 이제는 응원가가 돼버린 빠른 박자의 애국가를 힘차게 불렀다.

세계 최강 이탈리아를 맞아 '져도 되는거잖아'라는 서로의 위안 뒤에는 내심 '이길수도 있지 않나'하는 작은 신뢰가 응원단의 맘속에 감춰져 있었다.

이런 응원단의 속내를 알았던 것일까. 응원단의 열광적인 환호속에 등장한 플래카드에는 "하나님이 보호하사 한국 축구 만세"라고 적혀있었다.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후 하루하루 늘어만 가던 광화문 거리응원단의 규모는 드디어 종로 일대의 전면통제까지 불러올만큼 거대해졌다.

광화문 네거리에 설치된 전광판은 모두 5개. 가로수에 가리고, 앞사람 머리에 가리고, 멀어서 잘 안보이고…그래서 준비한 망원경과 휴대용 TV 까지도 함께하는 응원의 감격 앞에서는 일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급기야 응원단이 밀리고 밀려 찾아간 곳은 가요주점(?).

무교동의 한 가요주점 입구에 설치된 소형 TV 앞에는 200여명의 응원단이 모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가요주점의 야릇한 영상이 보여지던 브라운관에서 푸른 경기장과 태극전사들의 움직임이 중계되는 순간, 옆에 있던 한 꼬마가 아빠에게 "여기 뭐하는 곳이야"라고 물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순간, 아빠 왈 "으응, 노래방".

36년전 북한 대표팀이 4강 신화를 창조했듯이, 닮은 꼴로 이탈리아를 맞아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투지를 불태우는 경기장. 그런 닮은 꼴 신화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쌍동이 형제의 태극기 응원.

한국과 이탈리아가 서로 공격의 주도권을 쥐기위해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반 18분. 이탈리아 전문 키커 토티의 코너킥을 비에리가 정확하게 머리로 받아 오른쪽 네트 구석을 흔들었다. 순간 쏟아지는 눈물과 허탈한 마음이란. '차라리 기대를 말걸 하면서도 난 왜 8강이란 꿈을 꾸었을까'하며 고개를 숙여버린 한 응원단.

월드컵으로 가장 위협받는 직업이 있다면, 아마 축구해설가가 아닐까. 인터넷을 통한 자료수집에서 나름대로의 작전구사와 평가까지 완벽한 해설가로서 자리를 잡아나가는 축구팬들.

승리의 순간 거리를 달리기 위해 광화문 네거리 한구석에 예쁘게 자리잡은 차량의 보닛 위에는 경기장과 같은 두가지색의 잔디바닥과 우리팀 주전선수들의 등번호가 걸려있다. 감독의 입장에서 정리해 놓은 포지션.

한국대표팀 설기현의 기적같은 동점골은 후반 43분. 불과 2분만 지나면 경기종료 휘슬이 불고 광화문 네거리를 붉은 물결로 가득 채웠던 응원단들이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집으로 향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공이 골네트를 흔들때, 애띤 얼굴에 한 여학생은 한쪽 어깨를 훤히 드러낸 상의에 태극기로 감싼 청바지 차림으로 정말 방방 뛰었다.

주목, 여학생은 고급스런 옷차림에 잘 어울리도록 긴소매 장갑을 착용했지만, 색깔과 재질로 보아서는 분명 '고무장갑'이었다.

'붉은 악마'는 아닌듯 보이고, 여행용 가방까지 옆에 두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어딘가 다녀오시는 길인듯. 연장후반 안정환 선수의 극적인 골든골이 터지고 주변이 떠나갈듯한 폭죽소리와 함성으로 가득찼을때, 아주머니는 조용히 화장지를 꺼내 눈물을 훔쳤다.

안정환 선수의 얼굴도 눈물로 범벅이 됐다.

최건일 동아닷컴기자 gaegoo99@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