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라인 선상에 선 이운재의 무게 중심이 미세하게 골문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달려들던 호아킨 산체스가 볼 정면에서 잠시 움찔했다. '페인팅인가….'
호아킨 산체스의 오른발 슛은 그대로 골문 오른쪽으로 향했다. 하지만 두뇌 싸움에서 이긴 이운재의 몸은 찰나 앞서 이미 오른쪽으로 다이빙한 후였다. 볼이 쭉뻗은 이운재의 손에 맞는 순간 거함 스페인 선수들은 일제히 그라운드에 주저앉았다.
이어 한국의 마지막 키커로 나선 홍명보의 오른발을 떠난 슛은 경쾌하게 스페인 골네트를
갈랐다. 연장 120분까지 득점없이 비긴후 한국의 승부차기 5-3 승리.
120분간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가슴 졸인 경기였다.
숱한 찬스에서 골을 못넣은 건 스페인의 불운이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지칠줄 모르는 매서운 공세를 실점없이 버텨낸 태극 전사들의 끈기와 집중력은 꿀맛같은 승리를 안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경기 초반 주도권은 한국이 쥐었다. 전반 10분경 박지성과 김남일의 예리한 스루패스에 스페인 주장 이에로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한국의 리드는 오래 가지 못했다. 경기의 흐름을 반전시킨 것은 18분 골대를 벗어난 바라하의 오버헤드 킥. 스페인은 이후 데페드로-바라하-엘게라-호아킨으로 이어지는 강철 미드필더가 전열을 재정비, 잇따라 프리킥 찬스를 따내며 한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전반 25분 데페드로의 프리킥은 한국 수비벽에 막혔고 28분 모리엔테스의 머리를 맞힌 프리킥은 이운재의 신들린 선방에 무산됐다.
스페인의 공세는 계속됐다. 31분 데페드로의 코너킥에 이은 이에로의 헤딩슛이 크로스바를 살짝 넘겼고 42분 호아킨의 오른쪽 측면 돌파에 이은 센터링은 이운재의 손을 살짝 벗어나며 결정적인 찬스로 이어졌다. 전반 종료 직전 인저리타임때도 데페드로, 이에로의 위협적인 슈팅이 골문을 살짝 벗어났다. 전반 슈팅수 6-1로 스페인의 압도적 우위. 4만여 홈팬은 숨을 죽인 채 함성조차 지르지 못했다.
스페인은 후반 들어서도 모리엔테스와 호아킨의 위협적인 슈팅을 시작으로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전반 부상한 김남일 대신 이을용을 투입했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두번째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지친 유상철 대신 이천수를 투입하면서 박지성을 미드필더로, 이천수를 오른쪽 날개로 스위치 한 것.
수혈은 성공적이었다. 박지성과 이천수의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오른쪽 측면 공격의 물꼬를 튼 한국은 후반 22분 코너킥을 얻어냈고 이어 송종국의 센터링은 이천수, 박지성의 위협적인 슈팅으로 이어지며 상대의 혼을 뺐다.
한국은 이후 눈에 띄게 발이 느려진 스페인과 다시 팽팽한 접전을 이어나갔고 히딩크 감독은 후반 종료 직전 수비수 김태영 대신 공격수 황선홍을 투입, 연장전에 대비했다.
연장 들어서도 스페인의 불운은 그칠줄 몰라 전반 9분 모리엔테스의 결정적인 슈팅이 골대를 맞히는가 하면 후반 종료 직전 간신히 얻은 코너킥 찬스는 차볼 기회도 없이 이미 경기 시간을 넘긴 상태였다.
광주=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