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홍-홍명보 “신화는 계속된다”

  • 입력 2002년 6월 22일 19시 26분


홍명보 / 황선홍
홍명보 / 황선홍
모든 선수의 승리였다. 승부차기에 나선 선수나 어깨동무를 한 선수나 모두 4강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그 중에서도 두 사람, 황선홍(34·가시와 레이솔)과 홍명보(33·포항 스틸러스)가 있었기에 첫승과 16강, 8강, 4강의 엄청난 신화를 일궈낼 수 있었다.

90년대 한국대표팀 스타팅 멤버 11명 중 두 자리는 불변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숱한 선수들이 대표팀에 선발되고 탈락하는 가운데서도 최전방 공격수와 최종수비수는 늘 같은 선 수였다. 황선홍과 홍명보는 12년을 한결같이 대표팀을 지키며 영광과 좌절을 함께 맛봤다.

▽첫 만남〓90년 2월 홍명보가 성인 대표에 발탁되면서 둘은 처음으로 한솥밥을 먹게 된다. 대학 때까지 소속팀이 달랐던 황선홍과 홍명보는 청소년 대표에도 선발된 적이 없어 같은 유니폼을 입을 기회가 없었다. 황선홍과 홍명보는 대학 때까지 소속팀이 달라 같은 팀에서 뛸 기회가 없었다. 최전방 공격수와 최종 수비수로서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었던 둘은 선후배간 위계질서가 엄격했던 대표팀에서 ‘막내 생활’을 같이 하며 친구가 된다. 나이는 황선홍이 한 살 많았지만 홍명보가 일곱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 학년은 같았다.

▽계속되는 인연〓대학을 졸업하면서 황선홍과 홍명보는 계약금 1억원으로 제한된 드래프트제에 반발해 국내 프로입단을 거부했다. 홍명보는 군복무를 해결하기 위해 상무로 입대했고, 황선홍은 독일 부퍼탈에 입단한다. 92년 포항제철에 입단한 홍명보에 이어 황선홍이 93년 입단하면서 같은 팀에서 뛰게 된다. 이들은 95년 포항을 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포항의 중흥기를 이끈다.

97년과 98년 일본 J리그로 나란히 진출한 홍명보와 황선홍은 98년 다시 같은 유니폼을 입는다. 벨마레에서 뛰던 홍명보가 세레소 오사카로 이적한 것. 그해 수비형 미드필더로 뛴 홍명보의 후방 지원을 등에 업은 황선홍은 J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영광과 좌절의 무대, 월드컵〓대학 4학년 때인 90년 둘은 나란히 이탈리아월드컵 대표로 발탁된다. 88년 12월 대표팀에 발탁돼 A매치 첫 경기였던 아시안컵 일본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린 황선홍은 기량을 인정받아 선발됐지만, 홍명보는 운도 작용을 했다. 당시 최종수비수였던 조민국(현 고려대 감독)이 부상해 월드컵 직전 막차로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탈리아월드컵에서 둘은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다.

94년과 98년 월드컵 때 둘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홍명보는 스페인과 독일과의 경기에서 잇따라 골을 터뜨려 주가를 높였다. 그러나 황선홍은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 숱한 득점 기회를 맞고도 공을 허공으로 날려보내 축구팬들로부터 원색적인 비난을 받아야 했다. 황선홍의 불운은 98년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프랑스로 출국하기 하루 전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무릎부상을 당해 정작 본선무대는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그러나 네 번째 도전이 된 2002 월드컵에서 둘은 한국축구 월드컵 4강의 신화를 일궈냈다.

광주〓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권순일기자 stt7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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