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이미 오래전에 멈추었어야 할 열차였다. 첫 승리로도 충분했으며 16강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멈추지 않았다. 대항해 시대를 누빈 포르투갈을 누르며 8분 능선을 숨가쁘게 넘을 때 우리는 이 열차의 도도한 엔진에 대하여, 그 추진력에 대하여, 그 거침없음에 대하여 실신할 만큼 짜릿했다.
그리고 열차는 이탈리아 반도를 누볐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탓에 너무 일찍 신경질부터 부린 그들을 제압하며 한밭벌에 숨가쁜 경적을 토해내자 우리는, 아뿔싸, 실신하고 말았다. 기적이고 신화였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시청앞에서, 하다 못해 시골 공회당이며 아파트 잔디 위에서 우리는 한반도 땅을 구르고 또 굴렀다. 지구의 자전축이 뒤틀리고 우주의 질서가 휘청거리는, 작렬하는 밤을 우리는 만끽했다.
그것으로 열차는 마침내 쇳소리를 내며 멈추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경적을 울리며 열차는 또 달렸다. 제한속도조차 무시하고 거침없이 질주하여 아예 대륙의 한계를 벗어나 저 스페인의 무적함대까지 물리쳤다.
그들에게는 페르난도 모리엔테스가 있었다. 그는 면도날처럼 우리 수비진의 허점을 도려내며 공간을 주파했다. 호아킨 산체스가 있었다. 투우사의 능란함을 상기시키는 곡예로 서너명을 가볍게 제치며 골을 노렸다. 냉혹한 승부사 가이스카 멘디에타까지 투입됐다. 그러나 교체되어 나간 프란스시코 데 페드로의 예리한 각도를 그는 잇지 못했다. 급기야 엔리케 로메로까지 급파되었다. 저돌적인 복싱선수처럼 그는 우리 수비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모리엔테스는 회심의 일격을 골포스트에 들이박음으로써 패배의 냄새를 맡고 말았다. 최진철에게 영광을! 그는 심지어 스페인 축구의 상징 페르난도 이에로의 예기치 않은 공격 가담까지 막아냈다.
열차는 아예 브레이크 장치가 없는 듯했다. 이천수가 피레네산맥을 넘고 황선홍이 마드리드 광장을 누비자 끝내 신은 승부차기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이에로가 있었다. 그러나 이에로는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지극한 명성의 이에로가 아니었다. 첫 키커로 나와 골을 성공시킨 후 그는 한번 더 골문에 들어가 공을 찼다. 십수년 동안 이에로는 단 한번도 그렇게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에로 역시 패배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우리에게는 홍명보가 있었다. 우주의 질서를 깨뜨리는, 아니 우주의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는 빅뱅의 순간에 그가 있음으로써 역사는 합법칙성의 대미를 완성할 수 있었다. 그는 침착하게, 사격선수의 퍼펙트 골드처럼 골문의 심장 속으로 공을 꽂아넣었다.
다시 광주역. 밤은 늦었고 열차는, 덜컹, 거친 마찰음을 내며 북상한다. 도대체 이 열차는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극락강을 건넌 제3136호 열차는 뒤를 돌아볼 틈조차 없이 숨가쁘게 한반도를 거슬러 올랐다. 이 열차는 서울에 이르러 슬며시 브레이크를 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종착역인가.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 파란만장한 드라이브. 정녕 이 열차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정윤수 축구 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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