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선통신회사인 D사는 규모 등의 면에서 동종 업계에서 만년 2위를 달리는 기업. 그러나 지금은 임직원들 사이에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충만해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이번 월드컵에서 4강에까지 오른 원동력은 지금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도전의식’에 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선두 기업에 항상 뒤떨어지는 2위라는 사실이 직원들 사이에 뿌리깊게 배어있던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지금은 현재의 처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최고가 되자’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가 돌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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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생산라인용 설비회사 S사도 이번 월드컵이 전 직원이 다시 한번 결의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 이 회사 최삼길(崔三吉) 사장은 “거스 히딩크 감독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의 상황이 지금의 우리와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러나 한국팀의 승승장구를 보고 ‘우리도 해 낼 수 있다’는 의욕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변화는 우리 자신에게 내재됐던 ‘자신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축구가 월드컵 참가 48년 동안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첫 승을 어렵지 않게 이룬 데다 대망의 16강 진출에 이어 기대하지도 않았던 4강에까지 오르면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아직 이런 자신감이 수치나 외형적으로 드러날 만큼 구체적이지는 않지만 개인과 기업을 가리지 않고 사회 각 부문에 스며들고 있다.
▽나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2년 전 고등학교를 중퇴한 김모양(19·서울 송파구 마천동)은 미래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불안감으로 늘 자신을 갖지 못했지만 이제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도 놀란다.
“처음에는 ‘그들만의 월드컵’이라고 생각해 길거리응원에 나가지도 못했어요. 하지만 우리 선수들의 노력과 눈물을 본 순간 ‘나도 일어설 수 있다’는 뭉클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솟아올랐어요.”
김양은 월드컵 중반부터 헬퍼(Helper)라는 응원동호회에 가입해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 나가 수십만명의 응원단을 ‘지휘’하며 응원전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빛맹학교 학생들도 거리응원을 직접 체험한 이후 외부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수업시간에도 적극적으로 질문하는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학교 차현화(車賢花) 교사는 “처음에는 학교 밖에도 나가기 싫어하던 아이들이 거리응원전에 참석하고 나서는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차 교사는 “정상인들과 어깨를 맞대고 함께 소리지르고 응원하면서 아이들이 ‘우리는 정상인과 다르다’는 생각을 지워가고 있는 것 같다”며 “거리응원의 감동을 전해들은 다른 아이들도 몰래 참가한 뒤 새벽에 돌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욕심만은 아니다〓자신감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거나 ‘출세를 해야 한다’는 등의 단순한 욕망과는 다른 형태의 감정으로 표출되고 있다.
울 종로구에서 분식점을 운영하는 이기석씨(43)는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가슴 뭉클한 모습을 보고 사업에 자신감이 생겼다”며 “하지만 그것은 ‘더 큰 곳으로 옮겨야지’하는 욕심이 아니라 왠지 지금보다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그런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대학생 김칠곤씨(25·서울 송파구 가락동)는 “그동안 지방에 있는 대학에 다녀서, 머리가 좋지 못하니까 등의 이유로 큰 꿈을 갖지 않았으나 이제 나도 큰 꿈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선수들이 보여준 것은 ‘4강 신화’라는 실적 못지 않게 ‘이루지 못할 꿈은 없으며 그 길은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모든 국민에게 확인시켜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당초 ‘제대로 해 낼 수 있을까’라는 우려가 없지 않았던 월드컵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것도 이런 자신감을 증폭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조직위원회 이재준(李載俊) 대변인은 “대회 시작 전 경기, 교통, 숙박 등 여러 부분에서 우려가 있었다”며 “더구나 모든 면에서 일본과 비교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 대변인은 “그러나 우리 팀이 4강에까지 오른 데다 폭발적인 거리응원과 성숙한 시민의식 등 예상치 못했던 국민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모든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거뒀다”고 말했다.
자원봉사활동은 한 송혜남씨(22·여)는 “처음엔 솔직히 실패한 월드컵이 될까봐 걱정을 많이 했으나 점차 생각이 달라졌다”며 “시간이 갈수록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증폭돼 갔다”고 전했다.
▽전문가 진단〓이번 월드컵은 수십년간 젖어온 한국인의 패배주의를 한꺼번에 해소시키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화여대 한국학과 김영훈(金映熏) 교수는 “한국 국민은 스스로 원해서라기보다는 외부로부터 변화를 강요받았기 때문에 자기부정 의식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며 “이번 월드컵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기긍정 의식을 키워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또 연세대 심리학과 김민식(金民植) 교수는 “집단적으로 맛본 성취감은 그 정도나 지속성 면에서 개개인의 성취감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며 “이렇게 얻은 자신감은 삶의 고비마다 기운을 북돋워 주고 능력을 최대한 발휘케 한다”고 말했다.이진구기자 sys1201@donga.com
민동용기자 mindy@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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