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국기 게양대에서 내려오다
양윤선씨(22·상명대 섬유공예디자인학과)는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3000원 주고 동네에서 태극기를 샀다. 흔들기 위해서? 천만에! 입기 위해서다.
양씨는 태극기를 가위로 오리고, 바늘로 꿰매고, 재봉틀로 박음질해 멋진 ‘태극기 셔츠’를 만들었다. 이 셔츠를 입고 양씨는 길거리에서 “대∼한민국”을 목청껏 외쳤다.
“옛날 어른들의 생각과는 많이 바뀐 것 같아요. 태극기를 이렇게 옷으로 만들어 입으면 오히려 국기를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 좋지 않나요?”
월드컵이 우리 사회에 미친 가장 큰 영향 중 하나는 태극기의 재발견이다. 월드컵 전만 해도 태극기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근엄한 당신’이었다.
국기하강식 때 애국가가 울리면 길을 가다가도 가슴에 손을 얹고 멈춰서도록 교육받았던 세대에게 태극기를 가위로 오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일. 반면 젊은층에게 태극기는 권위주의의 상징이자 관심 밖의 물건이었다.
그러나 월드컵과 함께 젊은이들은 너도나도 태극기를 찾았다. 태극기 생산업체들은 6월 한 달 동안 2300만개에 이르는 태극기가 팔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극기 랩 스커트부터 원피스 티셔츠 탱크톱 망토 스카프 두건 문신까지…. 젊은이들은 태극기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발견했다.
직장인 조은주씨(35)는 “성조기는 아무렇게나 걸쳐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태극기는 왠지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월드컵에서 응원을 하면서 처음으로 태극기가 멋지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태극기 탱크톱’을 입고 광화문에서 응원한 최윤미씨(21·서울 마포구 염리동)도 “태극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목걸이나 귀고리 같은 장신구를 안했다”며 자신의 ‘패션 컨셉트’를 설명했다.
두 딸 은지(8)와 은혜(6)에게 태극기를 원피스처럼 둘러 입힌 주부 정혜정씨(34·서울 노원구 공릉동)는 “국기라고 해서 특별히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태극기에 친밀감을 느끼게 돼 좋다”고 말했다.
태극기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앞으로 태극기는 미국의 성조기나 영국의 유니언잭처럼 하나의 디자인으로 자리잡을 전망이다.
의류업체 FnC의 이지현 디자인실장은 “태극 문양은 강렬한 보색 대비로 강한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린다”며 “태극 문양을 사방연속무늬로 사용할 경우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디자인 패턴도 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붉은색, 이념의 껍데기를 벗다.
한국팀의 공식 응원복처럼 된 붉은 티셔츠. 이 셔츠에 적힌 ‘비 더 레즈(Be The Reds)’라는 구호는 80년대만 해도 감히 내놓고 할 수 없었을 문구다. ‘Reds’라는 단어에는 ‘빨갱이’라는 뜻이 포함돼 있기 때문.
냉전 논리가 무너진 후에도 붉은 색에 대한 거부감만은 그대로 남았다. 중장년 이상의 세대 중에는 시위나 파업현장의 붉은 머리띠와 현수막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정치권에서 아직도 유통되는 ‘색깔 논쟁’이라는 말의 ‘색깔’ 역시 붉은 색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월드컵 이후 싸움과 갈등의 상징이었던 붉은 색이 단결과 열정, 애국을 상징하는 색으로 떠올랐다.
민속학자 주강현씨는 “붉은 색은 태극기나 단청, 색동옷, 심지어 ‘일편단심’의 단심(丹心·붉은 마음)에서 알 수 있듯 본래 우리 문화사에서 절대적인 색이었다”며 “월드컵을 통해 잃어버린 색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붉은 색에 대한 열광은 유행 컬러까지 바꿔놓았다. 히피패션의 유행과 함께 올 여름 전 세계적인 유행색은 토파즈 블루였다. 그러나 세계적인 트렌드와 달리 한국에서는 붉은 색이 올 여름 유행색이 됐다.
여성 브랜드 ‘씨’의 디자이너 양선영씨는 “월드컵과 함께 스포츠나 캐주얼 의류 쪽은 물론이고 정장에서도 붉은 색 이너웨어가 신상품으로 많이 등장했다”며 “월드컵이 끝난 7∼8월까지도 붉은 색의 유행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컬러 리더쉽’의 저자 신완선 교수(성균관대 시스템 경영공학부)는 “현재 일어나는 ‘붉음’ 열풍이 적십자 정신의 박애를 뜻하는 사랑으로 갈 것이냐, 아니면 우리 머릿속에 각인된 투쟁으로 갈 것이냐의 갈림길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나이? 고향?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건 안 따져
한국이 4강 진출이 확정된 22일 서울 압구정동. 승합차 창문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상반신을 내밀고 ‘대∼한민국’을 외쳤다. 순간, 주변 사람들은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얼굴에 태극기 문신까지 한 이들은 50대 ‘아줌마’들이었던 것.
월드컵은 우리 사회의 체면과 형식, 격식을 ‘파괴’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대∼한민국”을 외치며 ‘짝짝 짝짝 짝’ 박수를 쳤다. 월드컵 얘기가 나오면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십년지기처럼 친해지고 한마음으로 똘똘 뭉쳤다.
점차 원자화(原子化), 개인화되고 있는 사회에 월드컵이 강렬한 집단 소속감과 일체감을 심어줬다는 점에서 사회학자들은 이를 긍정적인 체험으로 보고 있다.
숙명여대 정책대학원의 김영란 교수(사회학)는 “수백만명이 하나가 된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통해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앞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슈가 있으면 얼마든지 하나로 뭉치고 결집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앞으로 복잡다단한 통일 문제도 ‘한민족’이라는 공통 분모를 이슈화한다면 사회 통합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여성들 왜 월드컵에 열광했나
여성들이 왜 월드컵에 열광할까.
월드컵 기간동안 길거리 응원에 나선 군중 속에는 유난히 여성이 많아 관심을 모았다.
이중에는 열혈 축구팬도 있지만 축구가 몇 명의 선수가 뛰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평소 관심이 없던 여성들도 상당수였다. 이에 대해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과)는 “상당수의 여성들은 축구 그 자체보다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이벤트를 즐겼다”고 분석한다.
이벤트나 페스티벌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일상으로부터 ‘일탈’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 해방감을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남성보다 사회적인 억압과 행동의 제약이 많은 여성들이 ‘축구 이벤트’에 더 열광했다는 것.
황 교수는 “여성에게는 외부 공간에서 솔직하게 발산한 자기 자신의 모습과 감정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성들은 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에 스스로를 ‘집어넣어’ 왔을 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해온 게 사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그동안 억눌려 왔던 감정이 해방되면서 여성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것이다.
전업 주부들도 마찬가지. 사회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기 쉬운 전업 주부들도 다른 구성원들과 대등하게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열광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월드컵이 끝나면 기존의 ‘틀’로 다시 돌아가게 된다. 전문가들은 여성계를 중심으로 이번 월드컵 응원에서 여성들이 보여준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이미지에 대해 계속 의미를 부여하고 교육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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