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을 달린다. 뭔가 나타나는 듯 싶더니 벌써 발 끝에 부딪쳤다. 뒤에서 “10m 전방에서 왼쪽으로 돈다. 5m앞 오른쪽에 물병이 있다”고 소리쳐 줘야 발길을 옮길 수 있었다. 그렇게 105리를 넘게 뛰었다.
과연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시각장애인 육상선수로 시드니올림픽에 출전해 ‘인간승리 드리마’를 연출했던 말라 러년(33·미국)이 이번엔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 ‘아름다운 질주’를 선보여 지구촌을 감동시켰다.
4일 뉴욕의 5개 구를 굽이굽이 돌아오는 42.195㎞ 풀코스에서 열린 2002뉴욕마라톤 여자부 레이스. 러년은 처음 풀코스에 도전해 역주한 끝에 2시간27분10초로 5위를 차지했다.
우승자인 조이스 쳅춤바(케냐·2시간25분56초)에 불과 1분14초 뒤진 호기록인데다 미국 선수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성적. 더욱 우리를 숙연케 하는 것은 장애에 굴하지 않는 그의 끝없는 도전 정신이다.
러년은 9살때 망막 퇴행성 질환인 일명 ‘슈타가르트병’을 앓아 시거리가 정상인의 10%인 4.5m에 불과하다. 마라톤은 도로에서 벌어지는 탓에 육상 트랙과는 달리 바닥이 고르지 않다. 또 코스 곳곳에는 급회전 코스 등 장애물이 가로막혀 있고 레이스 도중 음료수 섭취도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대회 조직위는 자전거를 탄 조력자를 배치했다. 러년의 뒤를 따라가며 코스 변화와 장애물 위치 등을 소리쳐 알려주는 등 각종 돌발 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한 것. 그렇더라도 코너를 돌 거나 물을 마실 때 일반인보다 2∼3초는 더 걸리는 상황에서 2시간27분대를 뛰었다는 것은 불굴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하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
러년은 레이스를 마친뒤 “마라톤은 내 몸과 마음을 강하게 해준다. 오늘도 수많은 맨홀과 장애물을 넘어 완주했다. 보이고 안보이고는 문제가 안된다. 나는 더욱 좋은 기록을 위해 계속 달리겠다”고 말했다.
장애인올림픽에서 5개의 금메달을 땄던 러년은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 미국대표로 출전해 1500m에서 8위를 차지했던 선수.
이번 첫 마라톤 도전을 앞두고는 3개월 전 결혼한 코치 매트 로너건과 매주 360㎞를 달리는 맹훈련을 했다.
러년은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 달린다. 시각 청각 장애인 교육 석사 학위를 갖고 있는 러년은 늘 장애 어린이들에게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 너희들도 모두 할 수 있단다. 누구한테서도 ‘너희들은 못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된다”고 강조해왔다.
레이스를 마친 뒤 그는 “어린이들과 한 약속을 지켜 기쁘다”며 “앞으로도 장애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뉴욕〓홍권희특파원 konihong@donga.com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