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11회 베를린 올림픽에서 1위 골인하는 모습.
월계관을 쓰고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은 8월25일자 동아일보에 실렸고,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조선총독부로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받았다. 바로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귀국길에 싱가포르에서 사건 전말을 전해들은 손기정은 “나의 심경을 대변해준 동아일보에 감사한다. 기자들이 고초를 겪고 있어 죄송하다”고 술회했다.
15일 0시40분 별세한 손기정옹은 평생 가슴속에 ‘조국’이란 두 글자를 새겨놓고 살았다. 광복 후 감독으로 참가한 1947년 보스턴마라톤대회. 손옹은 출전에 앞서 서울 돈암동 자택에서 선수들을 합숙훈련시켰다. 서윤복씨는 “장독대 옆에 국기게양대를 세워놓고 이른 새벽에 함께 애국가를 부른 뒤 연습을 시작했다”고 회고한다.
보스턴마라톤대회 출발선에 선 서씨에게 손옹은 이 한마디를 던졌다. “윤복아, 조국을 위해서 달려라.” 그리고 서씨는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옹은 타고난 강골에 노력파였다. 16세 때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한 뒤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일화는 유명하다.
손옹은 1932년 신의주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해 2위를 차지하며 일약 장안의 화제로 떠오른다. 이로 인해 양정고보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듬해 제3회 대회에서 당시 1인자였던 유해붕을 누르고 우승하며 조선 최고의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한다.
손옹이 월계관을 쓴 지 56년 만에 황영조(黃永祚)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다. 그날 손옹은 1위로 결승선에 들어온 뒤 기진해 운동장에 쓰러진 황영조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울음을 삼켰다. 손옹은 그 감격을 동아일보에 이렇게 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가닥도 잡을 수 없다. …태극무늬를 가슴에 단 선수가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두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생애 한가운데는 늘 마라톤이 있었다. 병석에 누운 뒤에도 문안차 들른 사람들에게 손옹은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황영조 이봉주까지는 괜찮은데 다음이 없단 말야. 난 배가 고파서 못 뛰었지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안 하려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
손옹의 지병인 신부전증은 작년부터 갑자기 악화됐다. 13일 만성신부전증과 폐렴으로 입원하기 전에도 그는 7차례나 병원신세를 졌다. 증세가 악화돼 잠깐씩 의식을 놓기도 했던 그는 찾아온 사람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이렇게 살다가 가는 거지. 그나저나 마라톤보다 사는 게 더 힘들구먼” 하며 만년의 외로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얘기 끝마다 “그 맛있는 신의주 냉면 한번 먹어 봤으면 원이 없겠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평양 냉면이나 함흥 냉면은 근처에도 못 간다고. 내가 그 힘으로 뛰었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제 그의 넋은 육신을 떠났다. 지금쯤 그의 넋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신의주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