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독일 바덴바덴에 선생님을 모시고 갔었다. 처음에 한국 올림픽홍보관은 사람들이 잘 모이지 않아 한산했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 앞에서 사인회를 가지기 시작한 뒤부터는 붐비기 시작했다. 독일 사람들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생님을 아는지 너도나도 사인을 해달라고 했다.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선생님은 강직하고 진솔하신 분이다. 말보다 행동이 늘 앞서는 분이다. 한눈 팔지 않고 평생 체육인으로서 외길만 가신 분이다.
▽함기용 육상연맹 고문(1950년 보스턴마라톤 우승)
민족의 큰 별이 하나 졌다. 애석할 따름이다. 그분은 마라톤밖에 모르는 양반이었다. 올림픽을 제패한 뒤 정치에도 뛰어들 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후진양성과 마라톤 발전에만 몰두했다. 당신과 같은 대선수를 발굴해 국가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치려는 집념이 대단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서윤복 선생과 내가 탄생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만주벌판을 떠돌며 독립운동을 했던 열사들만 영웅이 아니다. 손기정 선생님도 그런 분들만큼 훌륭한 일을 했다. 손 선생님도 독립열사들과 같이 국립묘지에 안장했으면 한다.
▽황영조 국민체육관리공단 감독
92년 바로셀로나 올림픽에서 막판에 나와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가 1위를 다툴 때 선생님이 평소에 하시던 말씀을 떠올렸다. “일본선수에겐 절대로 져서는 안 된다”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난 죽을 힘을 다해 피치를 올렸고 모리시타는 결국 무너졌다. 우연하게도 내가 우승한 8월9일은 선생님이 베를린에서 우승하던 날과 같은 날이다. 94년 히로시마 아시아경기에서도 선생님은 “반드시 우승해 한국인 원폭 희생자의 원혼을 풀어 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본의 하야타 도시유키를 제치고 1위로 골인하자 “정말 잘했다”며 맞아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봉주 선수(삼성전자)
나뿐 아니라 국민 모두가 손기정 선생님에 대해선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라는 어려운 시기에 우리에게 큰 희망을 던져준 분이다. 어려서부터 존경해왔다. 마라톤을 하면서 힘든 역경이 닥치면 손 선생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리곤 했다. 그 분이 보여준 정신력은 내게 좋은 표본이었다. 손 선생님도 내가 부족하다 싶으면 크게 혼을 내셨다. 12일 병원을 찾았는데 선생님이 퇴원하고 안 계셔서 건강을 찾으신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가시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몸은 편찮아도 정신은 맑으셨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