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의 유명한 일화 하나. 81년 서울 방학동에서 의정부를 돌아오는 42.195㎞ 풀코스에서 열린 제52회 동아마라톤 시상식. 2시간21분23초의 저조한 기록으로 우승한 이홍렬이 시상대 에 서자 고인이 갑자기 시상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도대체 요즘 선수들은 정신 상태가 틀려 먹었어. 내가 뛸 땐 먹을 게 없어 배고픔을 참고도 세계를 제패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잘 먹고도 이게 뭐냐. 정신 똑바로 차려”라고 호통을 치는게 아닌가. 7순을 눈 앞에 둔 마라톤 대 선배의 쩌렁쩌렁한 질책에 손자 뻘인 후배들은 어쩔 줄을 몰라했다.
고인은 동아마라톤과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20세때인 1932년 열린 제2회 대회에서 2위, 다음해 열린 3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게 발판이 돼 3년뒤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어 한민족의 저력을 떨치 수 있었다. 동아일보는 1932년 3월22자 신문에 처음 동아마라톤에 출전한 고인을 이렇게 썼다. ‘작년의 기록 보유자요, 또 세계기록을 돌파한 김은배군이 신병으로 기권을 한 것은 유감된 바였으나 멀리 신의주로부터 원정을 온 손기정군이 2착을 한 것은 우리 마라톤계에 자못 힘있는 수확이다’.
올림픽 제패 이듬해인 1937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정간처분을 받아 대회를 열지 못하자 그는 “우리 민족이 나라 잃은 울분을 삭이고 희망을 불태울 수 있는 장이 사라졌다”며 애석해했다.
고인은 일제 강점기하에서 겨레에 불굴의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신기록의 산실로 한국 마라톤의 중흥을 일궈낸 동아마라톤과 함께 한길을 걸어왔다. 고인은 늘 “동아마라톤은 한국 마라톤의 젖줄”이라며 대회장을 찾았고 마라톤 관계자나 선수에게 항상 “마라톤을 하면서 힘들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모든 것이 한국 마라톤을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니 결코 포기하지 말아라”고 당부했었다.
고인은 1995년 12월부터 동아마라톤 꿈나무재단 이사로 재직하며 ‘꿈나무’ 발굴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관련기사▼ |
- [화보]손기정, 그는 진정한 한국인이었다 |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