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영웅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15일 새벽 별세한 손기정(孫基禎)옹의 빈소가 차려진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는 이른 아침부터 조문객의 발길이 줄을 이었다.
손옹의 제자로 1947년 보스턴마라톤 우승자인 서윤복옹과 50년 보스턴마라톤에서 우승한 함기용씨, 92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황영조(黃永祚·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씨 등이 차례로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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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원 대한육상연맹 회장은 “손옹은 단순한 체육인이 아니라 국민의 영웅이었다”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를 잃었다”고 애도했다.
또 일본에서 귀국해 임종을 지킨 아들 정인씨(59)는 “아버지는 마라톤밖에 모르셨다. 항상 밖에서 선수들만 챙기시느라 우리 남매(누나 문영씨와 정인씨)에겐 무뚝뚝한 아버지였지만 너무도 비통하다”며 울먹였다.
손옹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마라톤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평생 가슴속에 ‘조국’이란 두 글자를 새겨놓고 살았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해 일장기를 달고 시상대에 섰을 때도 손옹은 물끄러미 땅만 내려다봤다. 그는 훗날 “올림픽에서 우승선수 국가의 국기가 올라가고 국가(國歌)가 연주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난 결코 베를린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1912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난 손옹은 타고난 강골에 노력파였다. 16세 때 중국 단둥(丹東)의 회사에 취직한 뒤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리 길을 매일 달려서 출퇴근한 일화는 유명하다.
손옹은 1932년 신의주대표로 제2회 동아마라톤에 참가해 2위를 차지하며 일약 장안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른다. 이로 인해 양정고보에 입학할 수 있었고 이듬해 제3회 대회에서 당시 1인자였던 유해붕을 27초차로 누르고 우승하며 조선 최고의 마라토너로 자리매김한다.
손옹이 월계관을 쓴 56년 후 같은 날인 8월 9일 황영조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했다. 그 날 손옹은 1위로 결승선에 들어온 뒤 기진해 운동장에 쓰러진 황영조의 모습을 관중석에서 지켜보며 울음을 삼켰다. 손옹은 그 감격을 동아일보에 이렇게 썼다. ‘태극무늬를 가슴에 단 선수가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두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손옹의 화제는 최근까지도 한국마라톤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황영조 이봉주까지는 괜찮은데 다음이 없단 말야. 난 배가 고파서 못 뛰었지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런데 요즘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안 하려 한단 말이야. 1등 해본 사람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1등을 할 수 있는 법인데….”
그는 늘 고향을 그리워했다. 얘기 끝마다 “그 맛있는 신의주 냉면 한번 먹어 봤으면 원이 없겠어.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은 근처에도 못간다고. 내가 그 힘으로 뛰었어”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제 그의 넋은 육신을 떠났다. 지금쯤 그의 넋은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신의주에 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화성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