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화제]한국여자프로복싱 초대챔피언 이인영

  • 입력 2002년 12월 8일 17시 39분


이인영은 내년 1월 일본선수와의 대결을 앞두고 하루 5시간 이상의 강훈련을 하고 있다. 김동주기자 zoo@donga.com
이인영은 내년 1월 일본선수와의 대결을 앞두고 하루 5시간 이상의 강훈련을 하고 있다. 김동주기자 zoo@donga.com
국내 최초의 여자프로복싱 챔피언 이인영(31·산본체육관). 그를 만나러 가는 날 아침 지하철 승강장 안의 음반 판매점에서 70년대 히트곡인 사이먼과 가펑클의 ‘복서(권투선수)’를 들은 것은 우연이 아닌 듯 싶었다.

“아엠 저스트 어 푸어 보이 도우 마이 스토리 이스 셀덤 톨드(I am just a poor boy. Though my story is seldom told)….” 감미로운 기타 반주와 화음에 비해 노래의 내용은 사뭇 다르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대도시 뉴욕을 찾은 한 소년이 고생 끝에 3류 권투선수가 되지만 지치고 힘든 삶은 여전하다는….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며 이인영이 훈련중인 산본체육관으로 가는 동안 이런 저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보통 여자같으면 벌써 시집가서 아이 둘은 낳고 김장 걱정을 하는 아줌마가 됐을 나이에 살이 터지고 피가 흐르는 사각의 링이 뭐가 좋다고 뛰어든 것일까.

#31세의 노처녀가 글러브를 낀 까닭은.

-권투를 시작한 계기가 있을텐데….

“개인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술을 마시고 휘청대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케이블 TV에서 외국 여자권투경기가 중계되는 것을 보고 ‘바로 이거다’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다. 그래서 지난해 8월6일 집근처 산본체육관의 문을 두드렸다.“

-개인적인 시련이라면, 애인과 헤어졌는가.

“(웃음) 애인 따위는 관심 없다. 91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년 후 큰 오빠가 교통사고로 또 세상을 떠났다. 여기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 데다 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에 앉는 등 집안이 엉망이 되는 바람에 사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투는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나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지금은 집안도 안정됐고 어머니나 언니 오빠들도 제자리를 찾은 나를 성원해주고 있다.”

-TV를 보다 권투를 할 생각을 했다면 평소 주먹에는 자신이 있었다는 얘긴데….

“맞다. 나는 전남 광주에서 비아남초등학교와 중앙여중, 세종고를 다녔다. 중앙여중을 졸업할 때까지 달리기와 높이뛰기 포환던지기 핸드볼을 했다. 친구가 남학생에게 맞기라도 하면 바로 달려가 혼을 내주었다. 중학생 때는 인근 남자 학교까지 합쳐서 내 주먹이 제일 세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도 여자가 권투를 하려면 어려운 점이 많을텐데….

“내 팔뚝을 봐라. 웬만한 남자보다 강하다. 산본체육관에서 김주병 관장님의 지도로 권투를 하면서 기초를 잘 배웠다. 아직 시작한 지 1년여밖에 되지 않아 실전에서 다양한 기술을 구사하지 못하는게 아쉽다. 어렸을 때 싸움을 많이 한 탓인지 경기중에 맞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 않다. 한 대 맞으면 두,세대 때리면 된다.”

-권투를 하기 전 트럭운전사로 일했다고 하던데….

“고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택시운전사로 잠깐 일했다. 이후 96년 큰언니가 운영하는 음식점이 있는 경기도 평촌으로 옮겨와 식품회사에서 트럭으로 대리점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을 했다. 요즘 세상에 여자가 트럭운전하는 게 뭐 이상한가.”

-이제까지 한 번도 남자를 사귄 적이 없는가.

“중,고교 동창생 등 아는 남자친구는 있지만 애인으로 사귄 사람은 없다. 사실 그동안 연애할 생각을 못할 만큼 바쁘고 힘들게 살아왔다. 지금 내 관심은 오로지 챔피언 벨트 뿐이다.”

-앞으로 결혼할 계획은….

“생각할 틈이 없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꾸 그런 것만 묻지 마라. 남자건 여자건 순진한 사람이 좋다. 뺀질뺀질한 남자는 밥맛이 없다.”

-어릴 때 꿈은 뭐였나. 그리고 앞으로 목표가 있을텐데….

“체육대학에 진학해 운동선수가 되는 게 어릴 적 꿈이었는데 운동부에서 쓸데없이 기합을 주고 툭하면 때리는 바람에 집어치웠다. 권투는 일대일로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스포츠여서 마음에 든다. 목표는 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르는 것이다.”

-지난번 국내에서 처음 열린 여자프로복싱 타이틀전에서 초대챔피언에 오르고도 대전료는 고작 150만원에 불과했는데…,

“돈에는 관심없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복싱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에 마음놓고 권투를 할 정도만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큰언니가 도와주고 있어 다른 일은 하지 않고 권투에만 몰두하고 있다.”

-내년 1월 일본 선수와 대결한다던데….

“프로모터인 변정일 관장께서 일본 선수와의 경기를 추진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경기는 1월말경 우리나라에서 할 예정이다. 일본은 우리보다 여자권투가 활성화되어 있다고 한다. 거기서 아주 잘하는 선수로 고른다니 솔직히 긴장도 된다. 요즘은 아침에 2시간 정도 10㎞를 뛰고 오후에는 체육관에서 두서너시간씩 실전 대비 훈련을 하고 있다. 많이 성원해 달라.”

#파랑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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