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였을까. 박찬호는 예전의 순진함과 유머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장시간에 걸쳐 여러 포즈의 사진을 요구했지만 그는 순순히 응했다.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96년 겨울에도 박찬호의 얼굴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기자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본사를 직접 방문까지 해줬다.
기자는 또 엉뚱한 짓을 했다. 국내 신인왕을 차지한 동기생 라이벌 박재홍을 같이 불렀다. 그러나 박재홍은 한사코 박찬호를 만나지 않겠다고 우겼다. 오히려 그를 설득한 것은 박찬호였다. 너무나 고마웠다. 박찬호의 그해 성적은 비록 5승5패에 4홀드였지만 100이닝 이상을 던졌고 피안타율은 이후를 통틀어서도 가장 좋은 0.209였다.
하지만 박찬호는 이후 스타가 되는데 비례해서 멀어져만 갔다. 이유는 훈련과 사생활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해서. 지극히 합리적인 미국식 이유였다.
박찬호가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언론을 피했다면 김병현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빅리그에 올라간 2000년 겨울 본사로 찾아왔을 때만 해도 수줍음을 타긴 했지만 대답도 곧잘 했고 미소를 잃지 않았다. 컴퓨터 게임을 좋아하는 요즘 신세대와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김병현은 이후 그에게 쏟아지는 언론의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한 채 행여나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기자들이 오면 줄행랑을 쳤고 출국 날짜를 속이면서까지 언론을 따돌렸다.
이에 비하면 김병현의 1년 후배인 최희섭은 당돌할 정도로 적극적이다. 2001년 2월 애리조나 스프링캠프에서 처음 만났지만 그는 초면의 기자가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모든 것을 얘기해줬다. 올해 귀국후 기자회견을 할 때는 기자들의 질문이 끊어지자 본인이 직접 “좀 더하자”고 나섰을 정도였다.
한국인 메이저리그 ‘빅3’의 언론관은 이처럼 대조적이다. 누가 나은 지는 여기서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선수와 언론의 관계는 적이 아닌 동업자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한국은 선수를 인터뷰할 때 미국처럼 돈을 주지도, 일본처럼 선물을 주지도 않는다. 맨 주먹밖에 없지만 대신에 정(情)을 주고 또 받고싶어 한다. 최소한 기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장환수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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