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년 6월 발간된 ‘월간 럭비풋볼’ 창간호에 ‘럭비를 하던 꿈’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고(故) 조병화 시인의 시다. 8일 82세로 타계한 그는 탁월한 시인이기에 앞서 ‘영원한 럭비인’이었다.
서울 미동초등학교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던 고인은 경성사범(서울대 사범대의 전신)에 진학한 뒤 달리기를 잘해 럭비부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럭비는 그의 평생 친구였다. 경성사범을 거쳐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떠났을 때도 럭비선수로 활약했고 41년에는 조선대표로 선발됐다. 경성사범시절 고인은 낮에는 럭비를 하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불을 밝히며 공부에 전념, 수석을 놓치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나는 인생을 럭비처럼, 스포츠처럼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거고. 스포츠가 요구하는 결단력, 페어플레이, 창조력, 이런 모든 것들이 삶에 반영되면 그 삶은 아름답고 멋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평소 ‘인생을 럭비처럼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던 그가 생전에 지인들에게 남긴 말이다.
이같은 럭비와의 인연으로 고인은 해방직후인 46년 대한럭비협회(당시 럭비축구협회) 창설을 주도했고 59년 경희대 국문과 교수로 부임한 뒤 럭비부 감독을 맡아 15년 동안 선수들을 지도했다. 또 협회 이사를 역임했고, 매년 열리는 ‘럭비인의 날’에도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지병 악화로 병석에 누워있었던 올해 럭비인의 날(2일) 말고는.
60년 경희대에 입학해 고인에게 럭비를 배운 손두옥(63) 대한럭비협회 부회장(경희대 체육과 교수)은 “선생님은 일본 강점기 시절 태클로 일본인들을 괴롭힐 수 있다는 생각에 럭비선수라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연습할 때는 무척 엄격했지만 그라운드를 떠나면 다정다감하게 인생의 스승으로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말했다.
최근까지 럭비경기가 열리는 운동장을 자주 찾곤 했던 고인은 럭비를 소재로 한 시와 수필을 남겼고 2년 전에는 ‘럭비가(歌)’를 만들어 대한럭비협회에 전달하는 등 럭비 사랑이 유달랐다. 협회는 지금 고인이 지은 가사에 곡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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